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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진이, 지니> 정유정 /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빼앗은 인간의 속죄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일하고 있는 영장류센터 근처에 있는 별장에서 불이 났다. 그 별장에는 어째서인지 야생동물들이 있는 케이지가 있었고 안에 있던 동물 중 침팬지 한 마리가 도망쳐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119 구조대는 영장류센터에 도움을 청했다. 내일 낮에 베를린으로 떠나려 했던 나는 별로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스승과 함께 침팬지를 구하러 한밤 중에 나갔다. 스승과 나는 침팬지로 오해받은 보노보를 구출해서 연구소로 돌아오기 위해서 밴에 태웠다. 스승은 항상 운전이 불안했다. 오늘따라 더 불안했는데 안 좋은 예감은 꼭 들어맞는 법. 스승은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에 놀라 운전대를 틀었고 밴은 가드레일을 받아 버린다. 보노보를 안고 있느라 조수석에서 앉아 안전벨트를 하고 있지 않았던 나는 지니와 함께 앞 유리창을 깨고 튕겨나와 절벽으로 떨어졌다.

 


기대하면서 기다린 소설

정유정이 3년만에 쓴 소설이다. 사실 나에게 3년만이라는 시간이 큰 의미는 없다. 정유정을 안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의 소설을 읽은 것도 차례대로 읽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로 소설이 나온다고 해서 기다기긴 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을 읽었고 정유정이 쓴 소설 중에 네 번째로 읽는 소설인데 세 권 모두 굉장히 만족스럽게 읽었기 때문이다. 먼저 읽었던 책들은 모두 긴장감을 강하게 주는 책들이라 가슴을 잔뜩 졸이면서 읽었다. <진이, 지니>를 읽기 시작할 때, 각오를 단단히 하고 첫 장을 넘기는 것은 당연하다. 절대로 읽는 사람을 편하게 놔두지 않는 사람. 정유정은 나에게는 그런 이미지를 주는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에 소제목만을 읽으니 <28>의 느낌이 물씬 났다. <28>에 개가 중요하게 등장했다고 하면 <진이, 지니>에는 영장류인 보노보가 등장한다. 인간과 보노보의 교감이 중요한 소재일 것 같다. 그리고 또 어디선가 피가 튀겠지.. 라고 생각을 했는데 좀 다르다. 이전 세 권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가고 피가 튀는 장면을 마치 실제로 해 본 것처럼 자세하게 묘사했었는데 <진이, 지니>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안심했다.

 

정유정. 1966 ~ .


하드웨어는 그대로인데 소프트웨어는 바뀌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 부사도 극도로 자제해서 사용하고, 접속사는 볼 수가 없다. 정유정의 소설을 읽으면 최대한 절제된 문장과 빠른 속도감에 항상 감탄을 한다. <진이, 지니>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읽었던 그의 소설 그대로다. 전혀 변함이 없이 군더더기없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긴장의 끈을 놓기도 힘들다. 지금까지처럼 조각가가 돌을 쪼듯이 정성스럽게 가다듬었을 것이 틀림없는 정제된 문장이 이어진다.


그러데 내용은 다르다. 이전 소설에서 느꼈던 심장을 꽉 조이는 듯한 긴장감이 많이 사라졌다. 긴장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같지는 않다. 오히려 예전 소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함이 많이 스며들어 있다. 도구는 그대로인데 결과물인 조각품이 달라진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피칠갑을 하고, 다시 읽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던 고통스러운 외부묘사는 굉장히 많이 사라졌다. 대신에 내면 묘사에 집중했다. 그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살을 에이는 느낌이 많이 줄어든 것은 틀림없다. 물론, 이진이의 심정이 편해 보이는 건 아니다.

 

보노보. 인간과 가장 가까우면서 성격이 온순한 영장류.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주인공인 이진이는 큰 사고가 났지만 벼랑 밑에 있던 나무에 걸려서 겨우 살았다. 좀 아프긴 했지만 걸을만 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영장류센터로 가는데... 몸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평소 걷는 것과는 다르게 걷는다. 어? 뭐지?라고 생각하는데.. 이진이는 자신이 보노보인 지니(스승이 이름붙여 준)의 몸속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진이의 영혼이 지니의 몸 속에 빙의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진이는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민주는 때마침 근처에서 노숙을 하던 처량한 백수였고, 보노보의 몸으로 병원에 갈 수 없는 진이는 민주에게 천만 원을 사례비로 지급하기로 약속한 후 민주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향한다. 보노보의 모습으로 민주와 처음 대화할 때는 힘으로 굴복시키기도 하고 글을 써서 설득을 한다. 


이쯤되니 도대체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떻게 끌고 나가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끝맺으려고 하는 거지? 어째서 보노보(지니)의 몸 속에 진이가 빙의된 거지? 그럴듯한 이유라도 나중에 알려 주려나?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결국 정유정은 독자를 설득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다. 병원에는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보노보의 몸 속에 빙의된 진이의 영혼이 병원으로 간다고 해서 정말 되돌아 갈 수 있긴 한건가? 책장은 대책없이 넘어간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불안감

정유정은 자신의 작품속 인물들을 절대로 편하게 놔두지 않는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들을 보면 인물들을 극한상황까지 밀어 붙여서 주인공이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든다. 해피엔딩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도 않는다. 진이는 어떻게든 병실에 누워 있는 자기 몸 곁으로 가려고 한다. 그런데... 간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어렴풋이 그 곁에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이쯤에서 나는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유정이 주인공을 편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진이는 아마도 결코 편안하게 결말을 맞기 힘들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진이의 몸체는 그냥 죽어 버리고 진이는 지니의 몸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이건 또 이거대로 굉장히 충격적인 결말인데.. 제일 바라는 결말은 극적으로 자기 몸으로 돌아가서 얼마동안 코마 상태에서 치료를 받다가 정신을 차린 후 민주와 웃는 모습으로 재회하는 것인데, 정유정이 그렇게 놔둘 리는 없잖아. 그냥 마구 불안한 마음 뿐이다. 도대체 진이를 어떻게 할 거냐? 책의 결말은 내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수긍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슬프다.

 


진이와 지니의 공감

보노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주인공 진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인간에게 자유를 뺏기고, 몸까지 빼앗긴 지니. 예상과는 달리 진이와 지니가 대화를 한다든지 하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았다. 몸을 빼앗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니의 기억을 진이가 볼 수 있게 되고 기억이 현재로 흐르면서 진이는 자신의 육체가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행복한 숲속의 삶을 살다가 인간의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지니에게 미안하다. 일부러 한 것은 아니지만 지니의 몸까지 빼앗은 것도 미안하다. 결국 진이는 육체가 죽는 순간 자신도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예상과는 다른 결말이다. 원래 작가가 해피엔딩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니들 인간이 아무리 잘났어도 자연을 니들 편한대로 이용해 먹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작가는 묻는다. 자연을 그대로 좀 놔두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지니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인간세계의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사람이 물론 제일 나쁘다. 하지만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자기 편의에 의해서 지니의 몸을 떠나지 않고 있는 진이 역시 그런 자신의 모습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니의 것은 지니에게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리고 민주는 그 고생을 해 놓고 결국 아무런 댓가를 받지 못했다. 좀 뭐라도 챙겨주지..

 


훔치고 싶은 정유정의 문장

정유정이 쓰는 문장은 정말 멋지고 깔끔하다. 글쓰는 걸 좋아하는 나도 그의 문체를 따라해 보고 싶어서 부사와 접속사를 빼고 되도록 단문장으로 글을 써 보려고 노력해 봤다. 하지만 그게 정말 어렵다. 군더더기를 모두 빼고 글을 쓰려고 하니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접속사를 빼고 쓰는 건 더 어려워서 그러려면 앞뒤에 있는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접속사가 없어도 글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게 말로 하는 것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그만큼 정유정의 글은 멋지다. 아마도 일반적인 소설가보다 퇴고를 훨씬 여러 차례 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멋진 작가. 멋진 문장 솜씨이다. 따라하고 싶고 훔치고 싶다.


★★★★☆

정유정의 소설은 읽으면 도대체 뒷수습을 어떻게 할지 항상 긴장을 하면서 읽는다. 긴장감만큼은 우리나라 소설 중에 정유정 소설을 이길만한 소설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진이, 지니》도 마찬가지다. 다른 소설들은 긴장감에 잔혹함이 곁들여져 있다면, 《진이, 지니》는 긴장감 속에 따뜻함이 묻어 있다는 것이 좀 다르다.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재미있다.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