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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사토시 : 시공을 뒤섞어서 한바탕 난장을 벌여봅시다.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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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 도일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셜록 홈즈
내 이름은 셜록 홈즈, 탐정이지. 범죄의 도시, 안개 자욱한 런던을 떠나 조용한 시골 사우스 시에서 쉬고 있는 중이야. 하지만 언제나 사건은 나를 따라 다니는 듯 해. 어쩌면 내가 사건을 몰고 다닐 수도 있지. 이 조용한 시골 한구석에서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 조용했던 마을은 시끌벅적해 지고. 도저히 범인을 발견하지 못한 경관은 나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해. 내 숙명이라고 해야 하나?
경관을 따라가서 현장을 보니 완벽한 밀실살인이야. 피해자는 있는데 살인한 방법을 알 수가 없어. 결국 밀실트릭을 깨야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 피해자? 아, 피해자에 대해서 말을 안했군. 3류 추리소설가야. 자기 작품의 주인공인 탐정을 작품에서 죽여 버린 후에 독자로부터 항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스트레스를 받아 왔나 봐. 이름이.. 코난 도일인데, 유명하지 않은지 처음 듣는 이름이야.
괴상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단편집
표지를 보면 퀴르발 남작이 틀림없어 보이는 흑백 표정을 한 남자가 표지를 떡 차지하고는 째려 보고 있다. 옷깃사이로 손가락 일곱 개가 튀어나와 있고 왼쪽에는 낚시바늘 두 개가 튀어나와 있다. 전체적인 느낌이 일본소설 표지같다. 처음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표지가 책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든다.
저 일곱 개의 손가락이 책에 들어 있는 일곱 편의 단편을 의미하는 것일까? 《퀴르발 남작의 성》은 단편 일곱 편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그런데 일곱 편이 모두 괴상한 이야기들이다. 퀴르발 남작은 친척 아이들을 성으로 데려와서 잡아 먹는다. 셜롬 홈즈는 코난 도일이 어떻게 죽었는지 추리한다. 차화연은 대학시절 자신이 괴롭혔던 이현정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고, 강철수는 사람을 죽여 놓고는 자기 안의 다른 사람이 죽였다고 주장한다.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 소재들을 괴상하게 풀어 놓는다. 현실같으면서도 그 안에 왜곡된 판타지를 섞어 놓아 생경한 재미를 느끼게 하기. 《퀴르발 남작의 성》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왜곡된 서사, 왜곡된 기억
《퀴르발 남작의 성》은 '변형'과 '왜곡'을 다루고 있다.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의미있는 영화를 다루는 대학강의로부터 시작하는 첫 단편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영화가 어떻게 변형이 되어가는지 설명한다. 그걸 시간 순으로 되돌려 보면, 흑사병이 창궐하던 프랑스 작은 마을 부부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성으로 들여 보내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할머니가 아이에게 들려 준 이야기,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영화로 만드는 감독, 영화를 만드는 중에 참견하는 관계자들, 그 영화를 리메이크한 일본 감독, 그리고 그 영화를 다시 해석하는 교수.. 이렇게 이루어지면서 원래 이야기가 가지고 있던 서사가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번째 단편인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은 정말 재치가 넘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홈즈가 자신을 창조한 코난 도일이 죽은 사건을 조사하다니.. 비록 트릭이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죽으면서도 홈즈를 희롱하는 코난 도일과 '제4의 벽'을 뚫고 나와 추리하는 홈즈의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현실과 소설을 왜곡한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매듭>과 <그림자 박제>는 왜곡된 정신을 그려낸다. <그녀의 매듭>에서 차화연은 자신이 도와줬다가 질투로 망쳐버린 이현정을 아예 기억속에서 지운다. 기억에 빈틈을 만들어 버렸다. <그림자 박제>에서는 거꾸로 강철수가 톰, 제리, 강우빈이라는 세 인격을 품고 살고 있다. 다중인격 때문에 강철수 역시 기억에 빈틈이 생긴다. 정신도 왜곡되어 버렸다.
위에서 이 책이 일곱 편의 단편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차례를 보면 여덟 개의 소제목이 적혀 있다. 마지막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는 책 자체를 왜곡해 버린다. 가장 짧은 마지막 글은 이 책 전체에 대한 재치있는 개그다. 이 책에 등장한 인물들이 책을 펼치지 않은 동안에는 책 속에서 자기들끼리 파티를 하고 떠들면서 지내고 있다는 설정으로 쓴 짤막한 글이다. 마치 <토이 스토리>에서 장난감들이 사람이 없을 때 서로 대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형식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문정후 작가가 그린 <용비불패>라는 만화책에 비슷한 컨셉을 가진 장면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재치와 상상력이 넘치는 멋진 소설집
최제훈이라는 작가는 잘 모른다. 워낙 한국 작가에 대해서 많이 모르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책들도 꼭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멋진 상상력으로 다양하게 글을 쓴 소설가를 많이 알지 못한다. 특히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은 그리스신화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재치있게 마녀의 모습이 왜곡되어 가는 역사를 차분히 살펴 보는데, 정말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이야기를 잘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짧은 책 한 권 속에 강의, 민담, 기사, 취조 등 온갖 종류의 서술 기법을 자연스럽게 담아 놨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숨>을 쓴 테드 창이 자꾸 떠올랐다. 단편집을 썼고, 상상한 것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뻔뻔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조금 다르다면 테드 창은 하드 SF와 판타지를 넘나드는 글을 썼고, 최제훈은 역사와 일상을 다루는 글을 썼다는 점이다. 테드 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그만큼 최제훈 역시 굉장히 멋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
사실 그동안 한국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다. 사실 소설 자체를 그렇게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소설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내가 참 어리석었다고 반성하는 중이다.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고 읽는 책마다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퀴르발 남작의 성》도 그렇다. 읽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작가의 재치와 능글맞은 글솜씨에 매혹됐다. 최제훈이 쓴 다른 글들도 찾아서 읽어 볼 생각이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도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꼭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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