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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숨 Exhalation> 테드 창 Ted Chiang / 현역 SF작가중에 당신이 최고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타임머신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상인 압바스는 어느날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찬 새로운 가게에 은쟁반을 사러 갔다. 바샤라트라고 하는 가게 주인은 여러 가지 물건을 보여 주다가 수직으로 서 있는 원형고리를 보여 준다. 이 고리에 손을 넣으니 손은 통과하였으나 반대쪽에서 손이 나오지 않다가 잠시 후 반대쪽에서 손이 튀어 나온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손이 나타났다. 타임머신이다.

 

압바스는 말도 안되는 신기한 물건을 보고 협잡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인이 경험한 세 가지 얘기를 듣고는 이 물건이 과거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압바스는 이 물건을 보고 과거에 자신이 저질러 후회하고 있는 일을 되돌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타임머신은 만들어진지 얼마되지 않기 때문에 더 먼 과거로 가기 위해서는 이십 년 전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는 카이로로 가야 한다. 압바스는 바샤라트의 소개를 받아 카이로로 여행을 떠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테드 창. 1967 ~ . 중국계 미국인. 1~2년에 한 편씩 중단편 SF소설을 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SF 작가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설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테드 창의 신작

테드 창은 영화 <네 인생의 이야기>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이 있다는 걸 알고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대단한 작가였다. 테드 창은 실제상황같은 배경을 하나 정한 후에 그 배경 속에 상상력을 가득 채워 놓는다. 채워놓은 상상력이 배경과 잘 어우러져서 마치 실제같다. 아주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상상을 현실인 것처럼 꾸며 놓는다.

 

테드 창의 소설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언제쯤 소설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중편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구해서 읽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인터넷 서점에서 신작이 나온다는 알림이 떴다. 당연히 바로 주문. 읽던 책이 있어서 그 책을 읽은 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천일야화의 서술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SF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상 속에 현실을 못박아 버린다

여전히 대단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치밀하다. 테드 창의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의 일들이 모두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잘 몰라서, 공부가 부족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먼저 실려 있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천일야화>의 액자 이야기 구조를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 <천일야화>를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셰헤라자드가 칼리프에게 얘기를 하는 안에 다른 화자가 있고 또 그 화자가 얘기를 하던 중에 다른 얘기를 만들어 내고.. 끝도 없이 액자 속에 다른 액자가 끼여들면서 얘기가 진행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철저히 그 구조를 따랐기 때문에 이 단편이 <천일야화>의 어디 쯤에 들어가 있어도 이질감이 들지 않을 정도다.

 

책의 제목과 같은 단편인 <숨>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미리 정보를 주지 않는다. 자락을 깔아 놓지 않고 그냥 직접 얘기를 진행해 버린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슬슬 분위기 파악을 해 나가고 '아! 얘기를 하는게 사람이 아니라 로봇 비슷한 건가 보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로봇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정해 놓고 설득할 생각도 하지 않은채 소설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전편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독자들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양자붕괴에 의해 발생하는 평행우주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때 생길 수 있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소재 하나를 잡아 집요하게 상상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머신이 주제이다. 그 시대적 배경이 천년대 초반의 어느 시점이고 글을 쓰는 스타일이 천일야화에서 따온 것일 뿐, 타임머신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타임머신이 미래,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우주관으로 글을 쓴다.

 

<숨>은 엔트로피에 관한 우화이다. 숨을 쉴 수록 아르곤의 무질서도가 높아져서 세상의 아르곤 밀도가 낮아지면 결국 인류의 멸망이 올 것이라는 아이디어로 소설을 썼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읽자마자 스키너의 유명한 심리실험이 생각났다. <옴팔로스>는 지구가 창조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이고,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양자붕괴에 의해 평행우주가 생긴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사기를 쳐 먹을지 연구하고 있다.

 

테드 창은 하나의 소재에 꽂히면 그 소재로 인해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현상들을 집요하게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상상하는 것 같다. 그 후 가장 그럴 듯한 내용으로 소설을 써내려간다. 그 내용들이 전개되는 과정이 무리가 없어서 설득력이 있다. 소재 하나를 잡아 굉장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는 느낌이다.

 

옴팔로스 Omphalos는 델포이 신전에 있는 돌로서 세상의 중심을 표시한다.

★★★★

장르문학이면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 장르도 아닌 SF소설인 <숨>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떡하니 올리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테드 창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오로지 영화 한 편 뿐이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어쨌든 멋진 작가의 책이 인기가 있는 것은 충분히 기쁜 일이고 나도 강력히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이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가 책 속에 들어 있어서 불만이 있다. 이미 읽은 책이라서 약 150페이지 정도 읽을 필요가 없었던 건 많이 아쉽다. 아쉬움에 별 반 개를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