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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 가지야마 도시유키 梶山季之 / 고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사건 기록

* 책의 내용에 관한 언급이 있지만, 미리 읽어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내가 사도 씨와 특히 친해진 것은 <간음 성서> 때문입니다.
네? 모릅니까?
일명 <사악 성서>라고도 불립니다.
1631년 런던에서 출판된 성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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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서>의 <출애굽기> 20장 14절에,
-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성서에는 실수로,
-너희는 간음하라.
라고 인쇄된 겁니다.
부정의 'not'이 탈락되어 버린 거예요. 그걸 모르고 배포했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죠.
실수를 깨달은 영국 성서 협회에서 황급히 회수에 나섰지만 다 회수하지 못했다더군요.
<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 P. 247

작가인 가지야마 도리유키 梶山季之. 1930~1975. 서울 출생.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간다. 기업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이 높았고, 다작을 한 작가로 유명하다.

고서 판매상 세도리 남작의 일대기

작가인 '나'는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친구들과 긴자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십수년만에 '세도리 남작'이라는 노신사를 만난다. 세도리 남작은 오래된 책을 수집, 거래하는 사람으로 그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 그날 기분이 좋았던 세도리 남작은 나를 집으로 초대하여 술잔을 함께 기울이며 자신이 고서 수집가로 살아 오게 된 계기를 얘기해 준다.

 

세도리 남작의 본명은 가사이 기쿠야로서 어릴 때 산 <세계 미술 전집>에 푹 빠져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책을 그저 단순한 취미에로 여기던 가사이는, 어느날 헌책 노점상에게 손을 덜덜 떨면서 책을 사서 도망치듯이 사라진 가산도(이름, 미나미 준노스케)라는 노인을 좇아가 친해지게 되고, 고서 수집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가산도 노인에게서 고서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던 중, 가사이는 100권짜리 <요곡백번>이라는 희귀 고서적 가운데 78권을 우연히 발견하여 구매하고, 나머지 22권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까지 찾지 못했던 12권을 발견는데, 책의 주인은 책을 넘겨주는 댓가로 뜻밖의 조건을 제시한다. 결국 책주인이면서 남편이 얼마전에 죽은 미망인과 하룻밤을 지내는 댓가로 책을 받고, 결국 100권을 채워 완성한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일본의 고서적들.

가장 정적이고 고상해 보이는 취미

고서를 수집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각 에피소드의 제목은 마작의 패에서 이름을 따 왔고, 책을 수집하면서 생긴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에피소드의 제목과 내용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마작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읽는데 지장은 없다. 책, 그 중에서도 고서라고 하니 고상한 취미에 관한 얘기라고 오해할 만도 하다. 나로서도 고서에 대한 인문학적인 지식에 관한 책인 줄 알고 샀는데, 소설인데다가 고상한 내용도 아니다. 책 덕후로 시작해서 고서를 사고 파는 장사'꾼'들에 관한 얘기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내용 때문에 읽기 시작할 때는 당황했다. 그런데 재미있다.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얘기가 진행된다. 희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 온갖 정보망을 이용하고, 한 권의 책을 두고 경쟁하는 경쟁자들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한 질의 책에서 빠진 책 한 권을 찾기 위해서 수십년을 참고 기다린다. 고대하던 책을 찾았을 때의 희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책을 놓쳤을 때의 아쉬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책으로 읽는 'TV쇼 진품명품'이다. 내가 가진 책 중에 저만큼 값어치가 있는 책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물론 없다.

 

우키요에 浮世絵, 17세기~20세기까지 에도 시대에서 유행한 그림 양식. 니시키에 錦絵는 우키요에 중에서 목판화로 찍은 것을 말한다.

고서의 숲을 탐험하는 탐험가의 추리소설

사실상 추리소설이나 마찬가지이다. 추리소설은 사건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풀어 나가는 탐정과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소설은 책을 중심에 놓고 실마리를 찾고, 역사를 훑어 보고 집요하게 책을 찾는 탐정이자 탐험가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게 긴장감을 잔뜩 느끼며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역사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느낌도 든다. 이게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진행방식이라고 생각해 보니 일본 만화에서 주로 쓰는 방식처럼 보인다. 일본의 만화들을 보면 꼭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한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야기기 많다. 그런 방식의 만화의 원형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이 1974년에 출간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게 보인다.

장정은 책, 특히 표지를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작가에 관하여

소설의 배경이 1940년에서 1970년대까지이다. 그리고 작가인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1930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시대에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작가. 꺼림칙하다. 게다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고서를 구하기 위해서 팀을 짜서 한국으로 여행을 하고 기생관광을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쯤되면 한국을 식민지로 삼던 시절을 그리워 하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좀 불안해서 찾아 보다가 이런 기사를 보고 의식이 비뚤어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안심했다.

얼마 전 필자는 수필가 정명숙 선생으로부터 일본의 베스트 셀러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1962년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기 위해 “사상계” 장준하 사장에게 보내온 서신을 보여주기에 읽어 본적이 있다.

“장준하 선생! 제가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자료입니다.

1) 창씨개명정책 때문에 자살한 설진영 가족이나 그 지인들. 2) 3.1운동시 일본유학생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한 사람(최팔룡같은 사람). 3) 3.1운동 때 제암리 사건으로 학살된 걸 목격한 자나 그 연구자. 4) 강제동원으로 징병훈련소에 간사람, 돌아 온 사람, 도망자등. 5) 해방 후 한국에 귀화한 일본인 부인들과의 만남이나 좌담 희망. 6) 김광식과 같은 한국작가와의 만남. 7)전쟁중 일본인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현재도 활약하고 있는 30대의 저널리스트.

이런 자료들을 제가 원합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했던 시대에 저지른 죄상을 파헤쳐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는 일본과 한국이 새로운 우정으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지은 죄를 충분히 사죄하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성의 자료로서 이상의 사람들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작품 발표는 르포르타쥬, 소설 두 개의 형식으로 문예춘추에 게재할 예정입니다(하략).”
- 출처 : 경남일보, 김중위(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2015. 11.9.

다작을 했던 작가이면서 주제와 소재도 다양하다. 굉장히 뛰어난 글쟁이였던 것 같다. 이름은 처음 들어 봤지만 이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책을 쓸 정도면 다른 책도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 <이조잔영>(신상옥 감독), <족보>(임권택)라는 작품들은 한국에서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토슈사이 샤라쿠 東洲斎写楽의 작품. 샤라쿠는 에도시대인 1794년에 갑자기 나타나 1795년까지 단 10개월만에 130여점의 작품을 남기고 없어져 버린 의문의 화가이다.

그래서 간음성서는 무슨 내용이야?

책의 세일즈 포인트를 간음성서에 두고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이면서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정 裝訂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콩의 거부인 서창덕이라는 사람이 간음성서를 장정하기 위해서 일본 최고의 장정가인 사도라는 사람을 홍콩으로 초빙한다. 서창덕의 요청은 살아있는 어린 여성의 살가죽으로 책을 장정해 달라는 것이다. 책이 간음성서인만큼 그에 걸맞는 장정을 하려고 한 것이다. 사도는 그 요청을 받아 들여 처음으로 사람가죽으로 책을 장정한다. 이후 사람가죽으로 장정을 하는 희열을 알게 된 사도는….

 

소설 속에 수많은 일본의 고서에 관한 정보들이 나온다. 이 소설을 읽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책에 대한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름이라도 들어 봤으면 훨씬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우키요에, 니시키에, 구미에 같은 그림에 관한 얘기들도 나오고 유명한 화가인 샤라쿠에 대해서도 나온다. 물론 잘 몰라서 아쉽다. 비슷한 얘기가 조선시대의 고서로 배경을 바뀌어 있었다면 훨씬 재미있게 읽었을 수 있을 것 같다.

간음성서. 출애굽기 20장 14절에 'Thou shalt commit adultery.(현대어. You shall commit adultery. 너희는 간음할지니라.)라고 씌여 있다. shalt와 commit 사이에 not이 빠져 있다.

★☆

고서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없이 봐야 한다는 어려움만 잘 넘어가면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작가의 원래 직업이 기자이기도 하다. 르포르타주를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런 소설이 1970년대에 나왔다는 점이 흥미로워서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어떤 소설이 있었는지, 뭘 읽어 봤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으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본격 고서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의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 추천.


※ 세도리 競取り

1. 원 뜻 : 고서점에서 책을 싸게 사서 다른 곳에 비싼 가격에 팔아 이익을 남기는 사람이나 그 행위
2. 책 속에서 : 새로 개점한 가게에 가서 알짜배기 고서만 골라 사는 것. 예를 들면, 헌책의 시가를 모르는 미망인이 남편의 장서를 밑천으로 고서점을 시작할 때 재빨리 그 서점에 가서 알짜배기 책만 골라내는 식으로 거래한다.
3. 세도리 남작 : 이 책의 주인공. 세도리의 명수. 당연히 다른 경쟁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4. 세도리 칵테일 : 세도리 남작이 즐겨 마시는 칵테일. 보드카, 진, 소주 등 투명한 색의 술을 물과 섞어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