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에 등장하는 타임머신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상인 압바스는 어느날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찬 새로운 가게에 은쟁반을 사러 갔다. 바샤라트라고 하는 가게 주인은 여러 가지 물건을 보여 주다가 수직으로 서 있는 원형고리를 보여 준다. 이 고리에 손을 넣으니 손은 통과하였으나 반대쪽에서 손이 나오지 않다가 잠시 후 반대쪽에서 손이 튀어 나온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손이 나타났다. 타임머신이다.
압바스는 말도 안되는 신기한 물건을 보고 협잡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인이 경험한 세 가지 얘기를 듣고는 이 물건이 과거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압바스는 이 물건을 보고 과거에 자신이 저질러 후회하고 있는 일을 되돌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타임머신은 만들어진지 얼마되지 않기 때문에 더 먼 과거로 가기 위해서는 이십 년 전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는 카이로로 가야 한다. 압바스는 바샤라트의 소개를 받아 카이로로 여행을 떠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오랫동안 기다려 온 테드 창의 신작
테드 창은 영화 <네 인생의 이야기>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이 있다는 걸 알고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대단한 작가였다. 테드 창은 실제상황같은 배경을 하나 정한 후에 그 배경 속에 상상력을 가득 채워 놓는다. 채워놓은 상상력이 배경과 잘 어우러져서 마치 실제같다. 아주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상상을 현실인 것처럼 꾸며 놓는다.
테드 창의 소설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언제쯤 소설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중편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구해서 읽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인터넷 서점에서 신작이 나온다는 알림이 떴다. 당연히 바로 주문. 읽던 책이 있어서 그 책을 읽은 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상 속에 현실을 못박아 버린다
여전히 대단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치밀하다. 테드 창의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의 일들이 모두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잘 몰라서, 공부가 부족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먼저 실려 있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천일야화>의 액자 이야기 구조를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 <천일야화>를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셰헤라자드가 칼리프에게 얘기를 하는 안에 다른 화자가 있고 또 그 화자가 얘기를 하던 중에 다른 얘기를 만들어 내고.. 끝도 없이 액자 속에 다른 액자가 끼여들면서 얘기가 진행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철저히 그 구조를 따랐기 때문에 이 단편이 <천일야화>의 어디 쯤에 들어가 있어도 이질감이 들지 않을 정도다.
책의 제목과 같은 단편인 <숨>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미리 정보를 주지 않는다. 자락을 깔아 놓지 않고 그냥 직접 얘기를 진행해 버린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슬슬 분위기 파악을 해 나가고 '아! 얘기를 하는게 사람이 아니라 로봇 비슷한 건가 보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로봇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정해 놓고 설득할 생각도 하지 않은채 소설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전편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독자들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다.
소재 하나를 잡아 집요하게 상상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머신이 주제이다. 그 시대적 배경이 천년대 초반의 어느 시점이고 글을 쓰는 스타일이 천일야화에서 따온 것일 뿐, 타임머신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타임머신이 미래,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우주관으로 글을 쓴다.
<숨>은 엔트로피에 관한 우화이다. 숨을 쉴 수록 아르곤의 무질서도가 높아져서 세상의 아르곤 밀도가 낮아지면 결국 인류의 멸망이 올 것이라는 아이디어로 소설을 썼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읽자마자 스키너의 유명한 심리실험이 생각났다. <옴팔로스>는 지구가 창조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이고,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양자붕괴에 의해 평행우주가 생긴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사기를 쳐 먹을지 연구하고 있다.
테드 창은 하나의 소재에 꽂히면 그 소재로 인해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현상들을 집요하게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상상하는 것 같다. 그 후 가장 그럴 듯한 내용으로 소설을 써내려간다. 그 내용들이 전개되는 과정이 무리가 없어서 설득력이 있다. 소재 하나를 잡아 굉장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는 느낌이다.
★★★★★
장르문학이면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 장르도 아닌 SF소설인 <숨>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떡하니 올리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테드 창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오로지 영화 한 편 뿐이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어쨌든 멋진 작가의 책이 인기가 있는 것은 충분히 기쁜 일이고 나도 강력히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이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가 책 속에 들어 있어서 불만이 있다. 이미 읽은 책이라서 약 150페이지 정도 읽을 필요가 없었던 건 많이 아쉽다. 아쉬움에 별 반 개를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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