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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달의 영휴> 사토 쇼고 佐藤正午 / 죽음을 뛰어 넘어 너에게 간다

* 이 포스팅은 소설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들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최초의 남녀에게 죽을 때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어. 하나는 나무처럼 죽어서 씨앗을 남기는, 자신은 죽지만 뒤에 자손을 남기는 방법. 또 하나는 달처럼 죽었다가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방법. 그런 전설이 있어. -P.181

장면1, 현재 : 만남

호텔에서 한 남자가 30대의 여자와 그 아이를 만나고 있다. 아이는 일곱살 정도인데 말투가 건방지다. 미스미라는 남자도 함께 만나기로 했는데, 오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며 얘기를 나누는 중.
- 등장인물
한 남자 : 오사나이 쓰요시, 아이 엄마 : 미도리자카 유이, 아이 : 네번째 루리, 오지않은 남자 : 미스미 아키히코

사토 쇼고 佐藤正午 (1955~ ) <달의 영휴>로 제157회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장면2, 15년 전 : 어느날 갑자기 낯설어진 아이

갑자기 딸 루리가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다. 며칠을 고생하다가 겨우 나았다. 아이가 나은 후 며칠 동안은 집안이 평온했다. 그런데 아내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한다. 아이가 어른스러워 졌다고 한다. 아이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이름을 알고 있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알 리 없는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린다. 급기야는 갑자기 집에서 사라졌다. 가 본 적이 있을 리가 없는 곳에서 발견됐다. 아빠는 루리와 돌아 오는 길에 대화를 나누고 함께 약속을 한다. 루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마음껏 돌아 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 루리는 아빠와 약속한 후에 다시 평범한 아이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날, 아내와 루리는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 등장인물
아빠 : 오사나이 쓰요시, 엄마 : 후지미야 고즈에, 딸 : 두번째 루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두 개의 음식. 왼쪽이 오사나이와 루리가 티격태격하는 소재가 되었더 도라야키. 도라에몽이 좋아하는 그 빵이다. 오른쪽이 미스미가 루리에게 줬던 이치고니, 하치노헤 시의 향토음식으로 성게와 전복이 들어간 맑은 장국이다.

뻔하고 흔해 보이는 환생 러브스토리

이제는 너무나 흔해 보이는 환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맨 처음 타임머신과 타임리프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을 때, 굉장히 신선했지만 이제는 너무나 흔한 장치가 되어 버렸다. 환생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누가 환생과 러브스토리를 연결지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의 강을 건너 다시 찾아온 영원한 사랑, 처음에는 굉장히 신선했겠지. 이제는 아니다. 단물이 빠질대로 빠졌다. <달의 영휴>는 그 진부한 소재를 다시 끌어들어 들였다. 개연성이 있으면 재미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욕얻어먹기 딱 좋다. 미리 얘기를 하자면 재미있다.

우리는 이미 엄청난 환생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환생을 소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도깨비.

장면 3, 35년전 : 첫사랑에 빠진 남학생

미스미는 연애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스무 살 대학생이다. 비오는 7월,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 출근을 하는데, 가게 앞에 27살의 여자가 서 있다. 몇마디 말을 나누고, 수건이 없던 미스미는 티셔츠를 줘서 그 여자가 비를 닦을 수 있게 해 준다. 몇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녀가 간 후 계속해서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원래 사랑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다. 다음에 다시 그녀가 왔을 때, 둘은 미스미의 방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다.
그후로 한 달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출근 길마다 그녀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겨우겨우 만났을 때, 그녀는 평범한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역시 결혼을 한 여자였다. 할 말이 많았다. 그녀도 그랬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이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 한참 뜨거운 사랑을 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혼잡한 전철 플랫폼에서 밀려 선로로 떨여졌다. 당연히 전철이 들어오고 있었다.
- 등장인물
남 : 미스미 아키히코, 여 : 첫 번째 루리
내용은 여기까지..

제목에서 영휴(盈虧)는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작품속에서는 루리의 환생을 말한다.

갈수록 베일이 벗겨지고, 무늬는 촘촘해진다

처음에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인물들이 중요한 인물이 되어서 뒤에 등장한다. 그리고 아무 상관이 없었던 인물들이 사실을 이리저리 엮여 있다. 아무 상관이 없었던 사건들 역시 엮여 있다. 소설의 후반을 읽다 보면, '어? 이 사람이 이 사람이었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앞 부분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이야기를 굉장히 촘촘하게 잘 짜 놓았다. 사고로 세번을 죽은 루리는 세 번의 환생을 한다. 환생을 거듭하는 루리를 중심으로 축으로 해서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 얽힌 무늬를 풀어서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운 소설이다.

그리움에 관한 판타지

미스미와 루리를 중심으로 하는 러브 판타지이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주제는 사실 굉장히 닭살 돋는다. 하지만 서정적이고 뛰어난 필력으로 닭살돋는 설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새로운 인물이 나올 때마다 앞에서 만들어 놨던 복선을 회수하는 솜씨도 뛰어나다. 루리는 미스미가 그리워 환생을 하고, 만나기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다시 환생을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 달이 이지러졌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듯이 루리는 계속해서 환생을 한다. 루리라는 이름에 대한 집착도 강하여 태어나기 전에 엄마의 꿈속에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고 한자까지 알려 준다. 한 남자를 향한 루리의 그리움이 이 소설의 전체를 꿰뚫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든 루리와 미스미를 만나게 해 주고 싶어진다.

루리는 모두 네 번의 삶을 산다. 그리고 환생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어떤 인물일지 추측을 하면서 읽으면 그것도 흥미로울 듯.

아쉬운 후반부 일부

최근의 일본소설의 경향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는데, 후반 일부가 굉장히 사변적이다. 소설 내내 머릿속에 흘러가는 생각을 너무 자세하게 묘사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 경향이 심각해 져서 너무 많은 생각을 독자에게 쏟아내고 있어서 심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철학자의 머릿속을 뒤져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미스미와 미도리자카 유이가 대화를 할 때,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에 대해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아이디어를 얻은 책인 듯하다. 책의 뒤에 '참고 문헌'으로 밝혀 놓았다. 그런데.. 참고문헌을 밝혀 놓은 소설책을 이전에 읽었던 적이 있던가? 너무 뜬금없었다. 그리고 작자는 참고한 책에 대한 빚을 갚듯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전체적인 내용을 소설 속의 대화에 풀어 놓았다. 이 부분만큼은 마치 <달의 영휴>라는 작품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PPL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쌩뚱맞고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다. 어차피 소설 전체에 내용이 녹아 들어가 있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책의 내용을 소개했을까?

뻔한 내용이지만 뒤로 갈수록 루리를 중심으로 얽힌 사람들의 관계도가 궁금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 가면서 읽으면 뒷부분을 읽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생각도 못한 반전이 있다. 이 부분은 감각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복선을 느끼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알아채지는 못했다), 반전을 보고 나니 안심이 됐다. 하지만 소설에서 알려주지 않은 앞날은 여전히 걱정이다.

 

두가지 즐거움이 있다. 주인공 루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그리움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으면 첫 번째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짜맞춰 가면서 두 번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다 읽은 후에 처음부터 복선을 찾아가며 다시 한 번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