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잠에서 깼다. 누군가 엄마를 죽였다.
잠에서 깼다. 싱그러운 아침햇살과 함께 잠이 깼으면 좋겠는데, 피비린내가 온 방안에 진동을 한다. 약을 끊으면 아드레날린이 치솟아 오르고 활력이 끓어 오른다. 너무 많은 활력으로 기억을 잊기까지 한다. 약을 계속 먹으면 무기력증에 휩싸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무기력함이 싫어서 며칠동안 약을 끊었다. 마침 어제는 기억이 끊어져 버린 채 잠이 들었다. 피냄새가 심상치 않다. 아랫층으로 내려가 보니 엄마는 날카로운 칼에 목이 베여 살해당했다. 시신은 널부러져 있다. 내 몸을 보니 피투성이다. 도대체 누가 밤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어떤 놈이 우리 엄마를 저렇게 잔혹하게 죽여 버린 거야?
피칠갑을 한 소설
긴장감 넘치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정유정의 소설이다. <7년의 밤>은 끝도 없는 긴장감 때문에 치를 떨면서 책을 읽었다. 출간한 순서대로 <28>을 먼저 읽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종의 기원>을 집어 들어 읽었다. 정유정은 예상을 빗겨가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긴장을 하게 만든다. <7년의 밤>과 다른 점은 작품 내내 피가 철철 흘러 넘친다. 노골적으로 배경을 붉게 물들여 놓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소설의 화자인 유진은 급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에 당황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모든 상황이 가리키는 범인이 바로 유진, 자신이라는 점이다.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 와 보면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릴 처지에 처해 있다. 다른 사람이 엄마의 죽음을 알아채기 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서 억울하게 뒤집어 쓸 수 있는 누명을 벗어내야 한다. 함께 사는 친구이자 형제이며 엄마가 양자로 맞아들인 해진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야 한다. 눈치없이 자꾸 엄마가 어디에 갔는지 물어 보는 이모의 의심도 두렵다. 일단 거실에 흩뿌려진 피를 깨끗이 닦아 내고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도대체 누구지?
밀어 붙일 때까지 밀어 붙인다
정유정의 특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소설 중반까지는 마치 범인을 알아내는 미스터리물처럼 전개가 된다. 유진은 누명을 쓰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 상황을 모르는 이모와 해진이 자신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선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최대한 감춘다. 이 과정에서 굉장한 긴장감이 가슴을 졸인다. 해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가 죽은 거실에서 티비를 본다. 이모는 자꾸만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전화는 왜 꺼져 있는지 꼬치꼬치 묻는다. 유진에게 감정이 이입되어서 내 속도 같이 타들어 간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지, 범인은 누구인지, 범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유진과 함께 고민을 한다.
유진의 기억은 점점 되살아나고, 범인이 바로 유진 자신임이 드러나는 순간, 독자는 순식간에 유진과 심리적인 거리감을 갖게 된다. 이제 해진과 이모가 위험해 처해 있다. 유진은 계속해서 자신이 살인을 하게 된 이유를 상기하고 독자를 설득하려고 한다. 결국 유진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같은 이모를 살해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읽는 사람의 사정같은 건 봐주질 않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피해야 하는 긴장감, 계속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유진에 대한 거부감같은 감정이 뒤얽혀서 읽는 동안 마음이 빳빳해지는 걸 느낀다. 점점 소설 속의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
유진의 시점에서 소설이 진행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째서 유진이 그 상태가 되었는지, 유진을 불행하게 만든 (것 같았던) 엄마와 이모에 대한 원망도 함께 느껴진다.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고 범죄자를 끝까지 괴롭힌다. 유진은 불안감과 죄책감에 의해서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 진다. 여기까지 보면 이전에 읽었던 <7년의 밤>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7년의 밤>에서는 주인공인 현수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감정이입을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비록 범죄자이긴 했지만 저 상황에 내가 처해 있었다면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굉장히 컸다.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 오는 영재를 증오하는 마음도 생겼다. <7년의 밤>에서는 현수와 영재가 악을 나눠서 가지고 있었다. <종의 기원>에서는 두 사람 몫의 악을 유진 혼자 다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오로지 유진만이 절대 악이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처음에 잠깐 들었다가 실상이 드러나면서 사그라 들어 버렸다.
이후 작가는 가차없다. 선이고 악이고 도덕적인 관점은 이 소설에서는 아무 쓸모없다. 순수하게 악인의 관점에서 소설을 진행해 나간다. 읽는 사람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래서 불편하다.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 나갔더니 결말도 씁쓸하다. 시원하게 끝이 나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결말은 아니다. 악인의 입장에서 소설이 끝나 버렸다.
한숨을 크게 한 번 들이 쉬고 책을 덮다
긴장감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것 같은 소설을 또 한 권 읽었다. 유진의 심리를 이렇게까지 자세히 묘사를 해 놓은 것을 보면 마치 정유정이 살인을 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상황과 심리묘사를 통해서 읽는 사람을 긴장시키는데는 최고의 소설가인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좀 사람을 그만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소설을 읽는 재미나 몰입감은 <7년의 밤>이 더 좋았지만 결말은 억지로 주인공 편이 승리를 거머쥐었던 <7년의 밤>보다 나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또 시간을 두고 <28>을 읽을 차례다. 마찬가지일까?
몰입감도 대단하고, 심리묘사도 뛰어나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를 힘들다. 누구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단, 잔인한 장면을 싫어하거나 평소에 공포영화나 스릴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읽기 힘들 수 있다. 편안한 에세이나 동화같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마음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읽을 때 되도록 감정이입을 하지 말고 거리를 두고 읽기를 권한다.
당연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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