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선을 벗어나 러시아로 떠난 여자
따냐(안나)는 조선 역관 집안에서 자란 여자다. 역시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교육 덕분에 따냐는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익혔고 특히 러시아어에 능하다. 집안에 닥친 불행을 피해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로 넘어간 따냐는 '얼음여우 사기단'에 픽업되어 유럽 귀족들에게 숲을 파는 사기에 가담한다. 그 와중에 경쟁사기단인 '흑곰단'의 조선인 '이반'을 만나고 자기가 속한 얼음여우 사기단을 속이고 숲 판 돈으로 한 몫 챙긴다. 따냐와 이반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5명으로 이루어진 갈범무리 사기단을 결성해서 큼직한 사기를 치고 다닌다.
처음 읽은 김탁환의 소설이다. 제목만 보고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는데 표지를 살펴 보니 '노서아 가비'는 러시아 커피였다. '아라사 가베'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무기삼아 구한말을 누빈다
배경은 조선이 저물어 가는 시기. 러시아에서 사기를 치는 일당이던 갈범무리 사기단은 민영환을 대표로 니꼴라이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단의 통역관으로 참석하면서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조선을 지키려는 민영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따냐의 마음이 움직인다. 따냐는 물론이고 이번 역시 조선인이기는 하지만 조선 이름을 잃은 민초들이다. 따냐의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처형단한 역관이고, 이반은 노비로 조선에서 도망친 부모 밑에서 자랐다. 도대체 이들의 마음 속에 조선에 대한 무슨 정이 남아 있을까?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정말 그랬던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민영환, 윤치호 이후 이완용도 나오고 고종도 등장한다. 아마도 당시에 러시아어에 능통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냐와 이반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누비고 다닌다. 이반은 고종의 통역관이 되고 따냐는 고종황제에게 커피를 끓여서 대령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의 흐름에 두 명의 가상인물을 슬쩍 끼워 놓았다. 두 사람에게 대단한 역사인식 따위는 별로 없다. 이반은 권력을 향해 움직이고 따냐는 이반을 향해 움직인다. 소설 내내 왠지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와는 다른 맛을 품은 커피향이 진동하는 것 같다. 러시아 커피는 더 쓰고 거칠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 책은 커피향 가득한 정서를 전달한다. 아마도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데서 착안한 소품이고 제목일 것 같다. 커피향 가득한 소설.. 좋다. 하지만 이 책이 재미있었는지 물어 본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따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구한말의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건이 흘러가지만 엄청나게 흥미가 돋지는 않는다. 독자가 책 속에 푹 빠지기에는 인물들에게 크게 동화가 되지도 않고 연민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빨리 쉽게 읽을 수는 있는 굉장히 재미가 있지는 않다.
나는 그 이유로 이 책이 너무 짧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250 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지만 작은 판형, 자간 간격, 중간에 들어 있는 그림을 감안해 보면 꽉 찬 책 기준으로 70이나 80 페이지 정도밖에 안된다. 한 인물의 삶과 구한말의 복잡한 정세를 다루기엔 너무 짧다. 그러니 모든 사건이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인물들도 두 주인공 빼고는 그냥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정도다. 어느 인물 하나 정붙일 사람이 없다. 당연히 인물 묘사도 생생하지 않고 굉장히 평면적이다. 따냐와 이반도 마찬가지. 오래 등장한다고 정드는게 아니다.
아관파천에서 환궁까지의 긴박함
필치가 담담한 편이라서 크게 긴박감이 느껴지는 소설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반(김종식)이 고종을 암살하기 위해서 따냐가 갈아 놓은 커피에 아편을 몰래 넣는 장면은 가상의 인물이 적극적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대담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걸 막은 따냐의 활약 역시 눈에 띈다. 더불어 마지막 따냐와 이반의 대화는 인상깊다. 어떻게든 이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으려는 따냐. 따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이반. 따냐는 이반을 사랑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반이 따냐를 사랑했는지는 궁금하다. 그리고 이반이 했던 모든 말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도 궁금하다. 이 모든 궁금증은 이반이 거열형에 처해져서 진실은 이제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흥미진진하게 사건들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정확하게는 사건은 흥미진진할 수 있을 뻔했는데 긴박감이 흐르지는 않는다. 담담하게 글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구한말의 실체적인 모습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특히 역사책에서 '아관파천'이라는 사자성어 비슷한 사건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느껴볼 수 있는 점도 좋다. 마지막에 따냐는 빼째르부르크를 거쳐 미국으로 넘어가 카페를 열고 '노서아가비'를 판다. 그리고 그곳의 문인들과 교류를 갖는다. 참 안전하고 마음이 놓이는 결말이긴 한데, 이후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탄되고 국권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면서 따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지 않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읽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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