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독서편력의 시작, SF소설
기억을 되돌아보면 나의 독서편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동화전집으로부터 시작됐다. 찾아보고 싶어도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책들을 어릴 때 수십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이후 백과사전, 교과서, 위인전기 같은 책들을 미친듯이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이 책들은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내가 골라서 읽은 책들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사오신 책, 그냥 집에 있던 책을 그냥 읽은 것이다. 내가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 도서관에 갔을 때였다. 먼지 풀풀 날리던 도서관에는 당시에 아무도 읽지 않아 대출기록이 전혀 없었던 SF소설, 추리소설들이 가득했다. SF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이때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같은 작가들과 친해졌다. SF소설은 어린 나에게 상상을 돋워주고, 독서에 취미를 붙여준 장르이다.
장르소설은 그 목표가 명확하다. 추리소설은 알 수 없는 범인을 찾아가면서 마지막 범인을 찾아냈을 때 그 통쾌함이 극대화된다. 무협소설은 대의에 따라 영웅이 되어가는 대협의 풍모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판타지 소설은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지는 환상의 세계를 상상하는 재미가 우선이다. SF소설은 과학적 상상력을 현실과 잘 조합해서 마치 있을 것 같은 세계를 창조해서 지적 쾌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장편 《신의 궤도》를 읽은 후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일부러 찾아서 읽었다. 《신의 궤도》에서 멋진 설정에 비해 스토리텔링이나 장르적 쾌감이 아쉬워서 그걸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안녕, 인공존재》는 배명훈이 그동안 발표했던 중단편을 모아놓은 책으로 동명의 단편을 포함해 소설 여덟 편이 실려 있다.
설정과 아이디어는 좋았다
여덟 편의 소설이 모두 소재가 다르다. 다르면서도 굉장히 소설간의 간극이 크고 다양하다. <크레인 크레인>은 실체화된 종교를 다루고 <누군가를 만났어>는 고고학과 심령현상을 다룬다. 심지어 <안녕, 인공존재>에서는 철학까지 다룬다. 그외에도 마법, 우주론, 거대로봇 등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설정들도 좋다. 굉장히 다양한 지식을 지닌 작가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설정은 《신의 궤도》에서도 감탄을 한 바 있는데 《안녕, 인공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한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은 굉장히 부러운 점이고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장르적 재미는? 회수되지 않는 떡밥들
그런데 아이디어와 설정만 가지고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잘 살려야 좋은 소설이 될텐데 《안녕, 인공존재》는 아이디어와 설정을 보여주는 중반까지만 재미있다. 그 이후로는 어설프다는 느낌이 결말도 모두 어정쩡하다. 계속해서 하나의 아이디어에 집중하다가 명확한 결말을 지어주지 않고 소설들이 끝나거나 데우스엑스마키나가 등장한다.
그냥 끝난다. 뭔가 의미를 찾아 보려고 해도 찾기 힘들다. <안녕, 인공존재>는 철학적인 사변만 난무한다. <매뉴얼>은 그냥 궁금증만 잔뜩 풀어 놓고 망한다. <누군가를 만났어>는 도대체 뭐지? 던져놓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문학적인 효과를 노렸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SF소설로 놓고 보면 실망스럽다. 멋진 소재를 만들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진행하던 소설들은 어느 순간 힘이 쭉 빠져 버린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풀어 놓은 것들을 회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SF소설이라면 가질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문학상을 받을 정도이니 전문가들이 보기에 좋은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SF소설 팬의 한사람으로서 《안녕, 인공존재》은 읽고 나서 다른 SF 팬에게 읽어보라고 선뜻 추천할만한 책은 아니다.
★★☆
별로 재미없는 책이다. 뭔가 그럴싸하게 전개해 나가다 아무 것도 아닌 결말을 맺는다. 설득력있는 원인도 없고 개연성있는 결말도 없다. 대체로 뒷심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너무 아쉽다. 이 정도 상상력이면 훨씬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등산을 열심히 하다가 정상을 찍지 못하고 하산하는 느낌이다.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쉽다.
위에서 쓴 것처럼 선뜻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나는그래도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배명훈의 소설을 또 찾아서 읽어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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