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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신의 궤도》 배명훈 / 설정은 좋지만 조금은 아쉬운 SF 평작

2011년 발표

누명을 쓰고 15만년 후로..

김은경은 인공위성을 1,700개나 소유한 재벌 회장의 딸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정상적이지는 않다. 은경의 엄마가 회장의 현지처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엄마를 닮아 예쁜 외모를 자랑하는 은경. 하지마 은경의 엄마는 어느날 들이닥친 회장의 본처에게 수모를 당하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 이에 절망한 엄마는 3주 후에 자살하고 은경은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엄마는 진심으로 회장을 사랑했던 것 같다. 회장 역시 은경 모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이후 은경이 비행관련 공부를 해나가는 동안 눈치채지 못하도록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은경은 아버지의 도움을 알게된 후에는 아버지와 연관되는 것을 거부한다.

 

은경이 다니던 비행학교에는 바클라바라는 터키 출신 소년이 있다. 바클라바는 김회장의 회사에서 실행한 실험 실수로 부모를 잃고 복수를 다짐한다. 은경이 김회장의 딸이라는 것도 알고 접근을 한다. 딱히 은경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건 아니라서 둘은 티격태격하다가 가까워진다.

 

라경은 은경의 이복언니, 김회장 본처의 딸이다. 당연히 은경을 좋아할 리가 없다. 라경은 음모를 꾸며서 바클라바가 테러를 하도록 조장하고, 바클라바는 테러를 감행하다 죽게 된다. 라경의 음모에 의해서 은경은 공범으로 몰리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김회장은 은경을 살리기 위해서 몰래 빼내 동면하게 한 후 때마침 만들고 있었던 새로운 인간의 주거지, 정확히는 재벌들이 은퇴한 이후 살아가려고 만들고 있던 새로운 행성인 나니예로 가는 우주선에 탑승시킨다. 잠깐 자고 일어난 은경.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은경은 냉동되어 잠든 사이에 15만 년이 흘렀고 자신이 나니예라는 다른 행성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신의 궤도》는 근미래의 지구로부터 15만 년이 지난 후 나니예 행성이 멸망의 위기를 맞아 활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978 ~ . 한국의 SF소설 작가. 2011년에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자가상 수상

일꾼들만 있는 곳에 도착한 유일한 고객

배명훈이라는 작가의 SF 소설이다. 대체로 소설은 아무 정보없이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서점에서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고 소설이 SF인지도 몰랐다. 최근에 SF소설을 많이 읽고 있는데, 그 기운을 책에서 느꼈을지도.. 최근에 읽은 《삼체》는 마지막에 무려 수백억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버리면서 소설이 끝난다. 반면에 《신의 궤도》는 수백억년은 아니지만 무려 15만년 이후를 초반에 뛰어넘어 버리고 시작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소설같은 시간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나니예 행성은 지구의 부자 20만 명이 은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휴양지라는 설정이다. 나니예를 적절한 휴양지로 만들기 위해서 일꾼들이 먼저 출발하고 그 후 고객들인 부자들이 떠났는데 출발한지 6만년 후, 사고로 인해 동면이 풀려 버린다. 아직 9만년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는데, 다시 동면을 할 수는 없고, 식량도 3개월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두 사망하고 만다. 우주선이 나니예에 도착했을 때, 미리 도착해서 나니예를 만들어 놓은 일꾼들은 백골로 변한 고객들밖에 볼 수 없었고, 나니예는 일꾼들만이 사는 행성이 된다. 하지만 단 한 명, 사형을 피해 창조주인 김회장이 먼저 보낸 김은경만이 고객 중에 유일하게 나니예 건설 270년 후 동면에서 깨어났다. 나니예 행성의 유일한 고객이다.

무려 15만 광년 멀리 있는 나니예 행성. 하지만 그 곳에 가려고 했던 20만 명의 고객은 불행하게도 중간에 깨어나고 만다.

흥미로운 기본 설정

무려 15만년을 단위로 움직이는 소설이다. 생존가능한 다른 행성을 찾아 우주를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현실적이기는 한데 숫자가 너무 커서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15만년 이후를 보장하는 계약이라니.. 그래도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다루는 허무맹랑한 소설일 것 같지만 꽤 설득력이 있다. 특히, 15만 년 이후의 약속을 담보하기 위해서 안전보장 기금인 라경기금이라는 무력수단이 설정된 건 멋진 아이디어.

 

북반구를 지배하는 공식기구인 행정관리소 세력, 유목생활을 하면서 남반구를 지배하는 지난 세력, 천문교 세력으로 크게 3개의 세력이 있다. 천문교 세력은 또 관측신학자와 이론신학자로 나뉘고 남반구에는 지난세력에 저항하는 혁명 세력도 있다. 이 세력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비행기를 생명이 있는 양처럼 다루는 설정도 재미있고, 궤도를 돌고 있는 신의 존재를 밝히려는 천문교 관찰주의자파의 노력과 신은 관념으로만 존재한다고 믿어 실체를 부정하는 이론주의자파의 대립과 갈등을 다루는 것도 좋다.

정치, 사회, 경제, 종교를 모두 아우르려는 욕심

미래를 다루는 SF소설은 여러가지 면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고려할 수는 없다. 대체로 작가가 관심이 많은 한 분야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어떤 소설은 인간과 로봇의 갈등을 다루기도 하고 인간과 외계 행성인의 갈등을 다루기도 한다. 지구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대체로 한가지 부분에 집중을 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가볍게 처리해 나간다.

 

《신의 궤도》의 작가인 배명훈은 굉장히 똑똑하고 많은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 듯 하다. 두 권짜리 소설에 굉장히 많은 설정을 집어 넣었다. 정치적인 갈등과 종교인 사이의 갈등,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고, 경제 문제까지 다루었다.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설정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지만 얘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는 설정에 비해서는 아쉽다. 그래서 부분부분 설정 부분을 읽을 때는 굉장히 흥미로운데 책을 모두 읽고 나서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작가가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쓴 소설이다. 그런데 너무 총동원되어 있다. 멋진 상상력을 잔뜩 모아 놨지만 번잡하다. 잘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다. 여러가지 떡밥을 풀어 놓기는 했는데 깔끔하게 회수도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작품을 통틀어 나니예에 가장 큰 위험이 되는 경라기금은 어떤 경로로 조성되었는지 밝혀 놓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설정이 좋기 때문에 소설의 설정이 나오는 1권, 2권의 첫 부분은 굉장히 흥미롭고 소설 전체에 대해 기대감이 생긴다. 하지만 설정 부분을 벗어나면 몰입감이 떨어진다.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서 필력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책이 너무 짧다. 두 권짜리 책이고 600여 페이지이긴 한데 수많은 설정을 만들어 놓은 걸 생각하면 세부적인 과거와 현재의 얘기를 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다. 한 권 정도 분량을 더 늘려서 과거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고 현재와 연결시켰으면 좋았을 것 같다.

★★★☆

SF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상을 받은 건 굉장히 어필할 만한 경력이다. 그만큼 문학성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기회가 되면 배명훈의 다른 책도 읽어 볼 예정이다. 《신의 궤도》는 설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장르적으로 더 재미있을 수 있는 설정이 충분히 빛을 보지 못한 느낌이다. 나중에 천천히 보면서 놓친 것이 있지나 않은지 살펴봐야겠다.

신의 궤도 세트
국내도서
저자 : 배명훈
출판 : 문학동네 201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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