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백야행》도 일단 한 명 죽여 놓고 시작한다. 제일 처음 죽는 사람은 기리하라 요스케, 전당포 주인이다. 건축하다 말고 버려진 폐빌딩이 살해된 장소. 그의 주변을 탐문하던 경찰은 애인일지도 모르는 30대 중반의 여자 니시모토 후미요와 그와 연인관계로 보이는 40대 마쓰우라 이사무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유력한 용의자 두 사람은 모두 알리바이가 있다. 이제 그들의 알리바이를 깨고 범행을 입증해야 하는데 남자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일년 후 니시모토 후미요는 집에서 가스중독으로 죽는다.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아, 전당포 주인에게는 류지라는 아들이 있고, 후미요에게는 유키호라는 딸이 있다는 건 잘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뛰어나 몰입감,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소설 중에 꼭 읽어야 할 명작이라고 해서 사두었다가 큰 마음 먹고 있다가 붙들고 읽기 시작했다. 《백야행》에 손이 잘 가지 않은 건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 두꺼운 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다지 두껍지 않은 단권짜리였는데, 《백야행》은 꽤 두꺼운데다가 두 권 짜리 책으로 1,200 페이지에 달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새하얀 표지는 괜히 열어 보지 말라고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사놓고도 오랫동안 책장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한 일주일 정도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출퇴근하면서 사흘만에 모두 읽었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책장이 잘 넘어간다.
결국 만나는 평행선
아버지가 살해당한 남자아이 류지, 어머니가 자살한 여자아이 유키호는 각자 삶을 산다. 각각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마치 앨범에서 사진 하나씩 꺼내보듯이 펼쳐 놓는데,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이상한 사건들에 연루되기도 하고(유키호), 컴퓨터에 일찍 눈을 떠서 컴퓨터 관련 범죄로 돈을 버는 과정(류지)을 시간 흐름에 따라 보여준다. 두 아이는 아무런 연관없이 각자의 삶을 사는데 유키호는 현명하고 사랑스럽게, 류지는 어두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처음에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던 둘의 삶이 묘한 곳에서 교차하고 교차점은 책을 읽을수록 넓어지고 뚜렷해진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사건을 쫓는 형사인 사사가키 준조와 독자는 강한 의심만 가질 뿐이지 확신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인생 궤적은 마치 굉장히 큰 구체의 한 곳에서 평행이었던 두 대의 직선이 표면을 따라가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나는 것 같다. 그리고 두 직선이 만나서 안개속에 싸여 있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닫고 사건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재미뿐만 아니라 문학성까지..
백야행을 읽으면서 구성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결말의 처리방식은 더욱 감탄할 만하다. 많은 일본소설들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반전을 강하게 주려는 욕심에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도 그런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백야행은 다르다. 반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반전만을 위해서 내달린 소설이 아니다. 책의 절반 정도 읽으면 유키호와 류지, 두 아이가 많은 사건에서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결말이 오기 전에 이미 독자는 두 사람이 모르는 부분에서 연관이 있고 19년 전 살인사건의 전말을 모를 뿐이다. 그리고 19년 전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때, 충격은 충격이지만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더 크다.
개운하지 않지만 여운이 남는 결말
그 많은 사건들에 대해 유키호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 형사가 추측하고 독자가 수긍한대로 유키호와 류지는 긴 시간동안 공모한 것이 사실인지 소설에서는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는다.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되고 서로 연락을 하면서 지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모든 것이 정황 뿐이다. 류지의 죽음을 본 유키호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인 듯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만에 하나 형사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결국 소설은 정확한 결말을 맺어 주지는 않고 끝이 난다. 상쾌하지 않고 찝찝하다. 하지만 굉장히 멋진 결말이다.
★★★★☆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하는 대중소설가이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문학적인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백야행》은 소설의 재미도 재미지만 문학적으로도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다. 밝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유키호에게 숨어 있는 차가움과 섬뜩함이 잘 표현되었고, 류지의 성격도 매력적으로 묘사되었다. 무엇보다 이면에 숨어있는 사건을 뚜렷이 보여주지 않은 채 겉모양만 보여주고 점점 뚜렷해 지도록 구성해서 독자가 상상으로 메울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 가장 좋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소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몇 편 중에 한 편이다. 시리즈 중의 한 편으로 엮이지 않아서 배경을 몰라도 된다는 점 역시 강점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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