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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제훈 / 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

자신은 이곳 현실에서 퍼즐 조각들을 그러모아, 그것들을 서로 아귀가 맞게 조금씩 비틀어서, 전혀 다른 그림의 새로운 퍼즐을 하나 만들었던 거야.
p.257

이건.. 소년탐정 김전일?

산장에 서로 처음 보는 여섯 명의 남녀가 모였다. 여섯 명은 온라인 동호회 실버 해머의 회원들이다. 동호회 운영자인 닉네임 악마가 초대해서 모였는데, 악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실버 해머'는 연쇄살인마를 주제로 하는 동호회. 여섯 명의 닉네임은 그에 어울리게 한니발, 유혈낭자, 불면증, 왕두더지, 폐쇄미국, 전신마취이다. 악마는 기다려도 오지 않고, 준비된 음식이라곤 고급스러운 양주 뿐. 여섯 명은 어쩔 수 없이 빈 속에 양주를 마시다 각자 방에 들어가 잠을 잔다.

 

잠시 눈을 붙이다 날카로우 비명소리에 잠을 깨서 나가 보니 한니발이 둔기에 맞아 살해되었다. 사람들은 당황하고 유력한 용의자 유혈낭자를 침대에 묶어 놓는다. 휴대폰은 통화권 이탈, 경찰을 부를 수 없다. 때마침 눈보라까지 휘몰아쳐 하산할 수도 없다. 그런데 묶어 놓은 유혈낭자마저 몸쓸 짓을 당한후 살해된 상태로 발견된다. 범인은 모였던 여섯 명 중에 있을까? 아니면 악마가 어딘가 숨어서 연쇄살인을 벌이는 것일까? 그런데 이거.. 《소년탐정 김전일》 아냐?

최제훈 1973 ~ . 사진 출처: 아주경제

실망스러운 시작에 이은 파격적인 전개

두 번째로 읽는 최제훈의 소설이다. 이전에 읽은 《퀴르발 남작의 성》을 굉장히 재밌게 읽어서 그의 소설책 세 권을 더 샀다. 그런데 기발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으로 신선했던 《퀴르발 남작의 성》에 비해 도입부가 너무 식상해서 실망할 뻔했다. 김전일이라니.. 눈보라 치는 산장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라니..

 

그런데 두 번째 장인 <복수의 공식>을 읽으면서 머리가 번쩍 뜨인다.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이렇게 얘기를 분해해서 재조합해도 되는 거야? 어떤게 현실이고 어떤게 환상이지? 아니면 둘다 현실이 아닌 건가?

 

두 번째 장은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짧은 소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다섯 개의 이야기 구조가 심상치 않다. 첫장의 산장에서 인물들이 한 얘기를 마치 소인수분해하듯이 이야기의 원소로 나눈 후 그 원소들을 재조합해서 전혀 다른 얘기를 만들어 낸다. 그 와중에 또 다른 곳에서 가져왔을 법한 이야기를 첨가하기도 한다. 2장 내내 1장에서 나왔던 여러 개의 이야기 조각을 이리저리 퍼즐 맞추듯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마치 소설 습작을 쓰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소설?

그러더니 드디어 3장에서 커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이야기인가? 하지만 여전히 긴가민가하다. 세 번째 장 역시 앞서 있던 1, 2장의 소설을 또 잘게 쪼개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최제훈이라는 소설가가 여러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이리저리 조합을 하면서 습작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앞의 두 장과 조금 다르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정확히는 번역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거하며 계속해서 번역을 강요하는 것같은 여자. 번역하고 있는 소설은 첫 장의 제목과 같은 '여섯 번째 꿈'. 여전히 현실과 소설, 환상이 이리저리 뭉개져 있다. 이건 4장까지 계속 이어진다.

 

파편화된 이야기를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전작인 《퀴르발 남작의 성》도 특이했는데 이건 더 심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하지는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소설이 몰입도가 정말 뛰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나는 가지고 있는 조그만 이야기 조각으로 독자를 이렇게까지 끌어당길 수 있는 필력이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읽기 어려울 것 같은 이야기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의 플롯 구성능력과 필력이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최근에 책을읽으면서 특이한 이야기 구조에 많이 끌리는데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그 중에서도 최고다. 난해한 듯 하면서도 몰입도가 뛰어나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엉뚱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통 책을 읽을 때 인물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관계, 성격 등을 메모하면서 책을 읽는데 끝까지 읽고 보니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다. 혼돈의 미로를 헤매다 탈출못하고 갇혀 버리는 경험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퍼즐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소설이다. 라비린토스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을 느껴 보길..

 

오랜만에 내 기준으로 별 다섯 개짜리 소설이다.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