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정복하라
일단 주인공은 자크 클라인이다. 여자친구는 샤를로트. 엄마는 카롤린 클라인. 아빠는 요트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으니 신경쓸 필요는 없다. 자크는 어릴 때 좀 찌질했다. 공부도 못하고 체력도 약하니 또래의 힘센 녀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 수밖에.. 자크의 엄마 카롤린은 유명한 신경생리학자로 꿈 연구의 권위자인다. 엄마는 자크에게 꿈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쉽게 말하면 수면의 질이 떨어져서 꿈을 꿀 수 없게, 정확히는 꿈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지식의 갈무리도 못하고 트라우마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크가 최고 수준의 잠을 잘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잠을 훈련한다는 건 5단계인 역설수면까지 방해없이 자고 꿈을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걸 의미한다. 자크는 엄마에게 잠 훈련을 받은 후 머리도 좋아지고 트라우마를 극복하여 용기도 솟는다. 좀 부럽네. 잠만 잘자는 것만으로 이런 발전을 이루다니..
한편 카롤린은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꽤 유치한 제목의 프로젝트지만 최고 전문가가 수행중이니 그런가 보다 하자. 그 프로젝트는 1, 2, 3, 4, 5 단계 꿈보다 더 깊은 단계인 6 단계 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엄마는 6단계의 꿈을 수도자나 성자가 일종의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신 깊숙히 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위험할 법도 해서 아킬레시라는 수도자를 데려다 6 단계로 들어가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실험중 아킬레시가 죽었다. 이 소문은 매스컴을 통해 퍼지고 카롤린은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실종된다. 꿈속을 탐험하는 엄마와 아들을 지켜보는 소설이 《잠》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나라에서 책만 냈다 하면 반드시 베스트셀러에 올려 놓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굉장히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데, 본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오히려 인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나도 그의 초기작인 《개미》와 《타나토노트》를 보고 지식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엉뚱한 상상력을 잘 접목시켜 놓은, 손을 놓기 힘든 소설에 매혹을 느꼈다. 그래서 이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꽤 읽었는데 초기 소설과는 달리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카산드라의 거울》을 읽은 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쌓아둔 밑천이 이제는 다 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잠》은 오랜만에, 그래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이제 소재 다 떨어진 거 아냐?
《잠》의 주요 소재는 '잠'이다. 이게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잘 때 1~5 단계를 거치고 5단계는 '역설 수면'의 단계이다. 이 잠의 단계를 잘 조절하면 머리도 똑똑해지고 정서도 안정이 된다. 어릴 때는 좀 뒤떨어진 학생이었던 주인공 자크는 엄마가 유도해 준 '잠' 덕분에 유망한 의대생이 된다. 그리고 엄마는 5단계보다 더 깊은 단계인 6단계 수면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떠오르는 소설이 두 개 있다. 가사 상태에서 좀더 내면 깊은 곳으로 다이브한다는 설정은 《타나토노트》에서 가져 왔다. 단지 그것이 '꿈'이고 《타나토노트》는 그것이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외부의 도움으로 지능이 발전한다는 건 《뇌》와 비슷하다. 《뇌》는 지능이 초인적으로 발전한 반면 《잠》에서는 조금 똑똑해지면서 일종의 시간여행을 하고 영혼과 대화하고..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이 정도면 그냥 자기표절 아닌가? 표절이 아닐 수는 있지. 소설가가 직업이니 얼마나 그럴싸하게 변형했겠어? 하지만 이미 두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자기 표절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허접한 설정
소재는 좀 비슷한 걸 끌어다 그냥 좀 썼다 치자. 하지만 설정은 더 형편없다. 엄마는 수면전문가로 아들의 잠을 컨트롤해서 똑똑한 의대생을 만든다. 말레이시아의 소수 부족은 꿈꾸는 시간을 현실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서로의 꿈을 나누며 공동체를 유지한다. 자각몽은 언제든 이어질 수 있고, 내용도 뚜렸하다. 게다가 부족은 꿈이 모인 집단의식(집단무의식이 아니다)이 존재해서 5단계 꿈에 든 사람이 찾아갈 수 있다. 6단계 잠이 들면 꿈속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이게 잠이고 꿈이야? 그냥 유체이탈이잖아. 흔한 유체이탈을 써놓고 엄청난 과학이론이 숨어있는 것처럼 분장해서 써 놓았다.
물론 소설이 꼭 현실적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설득력과 개연성을 있어야 읽으면서 수긍하고 지나가는데 《잠》은 최소한의 덕목을 지키지 않았다. 《개미》가 명작인 이유는 개미에 대한 엄청난 과학적 지식을 쏟아 부은 후 그 이상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기 때문이고, 《타나타노트》는 많은 죽음에 대한 신화들을 집대성한 후 거기에서 한 발짝 상상력을 내밀었기 때문에 수긍이 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말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잠》은? 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 잠만 자면 모든게 다 해결된다. 미래의 '나'는 꿈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고 현자가 나타나 6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인 약물을 만드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 준다. 형태는 비슷하다. 하지만 밑바탕이 탄탄하지 않으니 쌓아놓은 건물이 그냥 무너져 버리고 만다.
★☆
좀 작정하고 까서 미한한데, 좀 쉬세요. 마른 수건 짜내듯 아무 것도 없는데서 자꾸 글을 쓰려고 하니 이런 졸작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개미》에서 103683호가 편지를 인간에게 전했을 때의 그 소름끼치는 충격이나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던 타나토노트들의 목숨 건 프론티어 정신을 기대하면 안되는 걸까?
쓰고남은 소재 조각들을 그러모아 소설책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파쇄된 종이뭉치같은 소설이다.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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