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심한 서민 유약진, 차용증을 잃어버리다
유약진은 하남지역 약수 사람이다. 공사장 밥집에서 요리를 하며 먹고 살고 있다. 42살이다. 유약진의 부인은 황효경이었다. 과거형이다. 황효경은 유약진의 초등학교 동창인 이갱생과 바람이 났다. 유약진은 바람난 현장을 덮치고 이갱생에게 따지려고 했으나 오히려 얻어터지기만 했다. 비참하기 그지없다. 어쨌든 화가 난 유약진은 아내와 이혼한다. 아내는 이갱생과 재혼을 하고 유약진은 아들 유붕거와 함께 살다가 북경으로 와서 혼자 산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황효경이 주겠다고 하는 아들의 양육비도 거절한다.
아내에게 양육비는 받지 않았지만 이갱생에게 위자료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이갱생은 위자료를 줄 수는 있지만 유약진이 돈을 받은 후 다시 시비걸 것을 걱정하여 6년 동안 아무 말썽을 피우지 않으면 6만원을 주겠다는 차용증을 유약진에게 써준다. 이제 위자료를 받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유약진이 얼후를 연주하는 길거리 연주자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차용증이 들어있는 가방을 도둑맞았다. 하늘이 무너진 유약진. 절대 6만원(중국 돈이니 곱하기 180을 하면 우리 나라 돈으로 약 천만원인데, 물가 차이를 따지면 거기에 몇 배 더 해야 할 것 같다.)을 포기할 수 없는 유약진은 차용증을 되돌려 받기 위해 도둑놈을 찾아 나선다.
처음 읽는 중국 현대 소설
지금까지 읽어 본 중국 소설은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같은 역사관련 군담소설이 아니면 김용이 쓴 무협소설 뿐이었다. 그나마 최근에 류츠신이나 켄리우, 하우징팡같은 휴고상을 받은 SF소설이 독서목록에 들어 있다. 유명하다는 작품도 거의 읽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현대소설의 경향은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유약진이다》는 중국 현대소설의 첫 인상을 만들어 주는 뜻깊은 소설이다. 좀 오버스럽게 의미를 부여해 봤다.
끝없는 등장인물, 복잡한 인물 소개, 흥미로운 구성
소설을 읽을 때, 메인이 되는 줄거리를 놓치면 읽어도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처음 몇십페이지에서 설명하는 배경을 읽은 후에는 보통 분위기가 익숙해지고 빠르게 책장이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유약진이다》는 200페이지(총 524페이지 책이다)는 읽어야 드디어 '주요 사건'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유약진이 도둑맞은 가방 속의 차용증을 찾는 것이 중요해 보였는데, 사실은 청면수 양지가 훔친 핸드백 속의 USB(마지막에는 무려 70만원까지 가격이 붙어버린다)가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모든 사람이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물건이다.
유약진과 청면수 양지의 상황이 정확하게 데칼코마니처럼 겹치도록 사건을 구성한 것도 굉장히 흥미롭다. 유약진의 가방을 청면수 양지가 훔치고 그 가방을 꽃뱀 장단단 일행이 빼앗아 간다. 중요한 물건은 가방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차용증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유약진은 양지를 찾아 다닌다. 이게 추격전의 한 축이다. 청면수 양지는 부촌에서 가주임과 인주임의 비리가 담긴 USB가 들어 있는 핸드백을 훔치는데 유약진이 그 핸드백을 가로챈다. 그런데 그 핸드백을 유약진의 아들인 유붕거가 훔쳐간다. 역시 이 사실을 모르는 양지는 유약진을 쫓는다. 중요한 물건은 역시 USB. 추격전의 다른 축이다. 마치 우로보로스의 두 마리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려고 하는 것처럼사건이 꼬여있다.
이렇게 서로가 쫓고 쫓기는 과정이 《나는 유약진이다》의 주요 내용인데 그 와중에 얽힌 인물들이 상당히 많다. 게다가 그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등장하는 사람이 태어난 지역부터 개인적인 사정까지 구구절절 읊어 놓는다. 도대체 왜 이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읽고 있기도 한다. 마치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까지 가는데 보이는 모든 휴게소에 들러 먹고 쉬다가 다시 출발하는 것같은 느낌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작가)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지만 조수석에 앉은 사람(독자)는 도대체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고 끌려가는 것 같다.
상당히 어지러운데 그래도 절반정도 읽어서 메인 스토리에 닿으면 목적지가 명확해져서 말끔해지고 여기까지 읽는 사이에 류전윈이 서술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게 되고 크게 혼란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독특한 표현을 읽을 수 있는 소설
《나는 유약진이다》를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한국소설이 한 권 떠올랐다. 천명관의 《고래》이다. 두 소설 다 왠지 얘기를 들려주는 화자가 풀어내는 '썰'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다. 《고래》가 아낙네들이 빨랫터에 앉아 두런거리며 소문을 주고받는 와중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면 《나는 유약진이다》는 저잣거리에서 이야기꾼이 돈 몇 푼 받으면서 썰을 푸는 것 같다. 아마도 명, 청대 길거리에서 썰을 풀던 이야기꾼의 얘기를 받아 적어 놓으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읽다보니 이전에 김용이 쓴 역사소설에서 많이 봤던 표현들이 자주 나와서 반갑다. '신발이 헤지도록 찾아다녔다'든지 아마도 '기호지세'를 풀어 쓴 '호랑이 등에 타는 꼴'이라는 표현도 재미있었고, 굉장히 자주 나오는 '흰 칼이 들어가 붉은 칼이 되어 나온다'는 표현은 섬뜩하다. 거기에 'OO가 □□한 것은 XX하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기 때문이었다.'라는 표현이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데 이건 '독자 니들이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저런 이유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독자를 희롱하고 흥미를 돋우기 위한 방법인 것 같다. 뭐라도 예상을 하면 꼭 작가가 태클을 걸어 버린다.
현대 중국의 중하층 삶을 살필 수 있는 군상극
내가 보기에 《나는 유약진이다》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다. 공사판 요리사이면서 잃어버린 차용증을 찾으려는 유약진과 권력자에 줄을 대서 성공했으나 그 권력자 때문에 망하기 바로 직전인 엄격,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 물건을 훔치고 잃어버린 청면수 양지이다. 이 세사람이 얽히는 사이에 수십명이 주변 인물들이 나름의 사연과 함께 곁다리로 끼어들어서 가시넝쿨같은 소설이 되었다. 그 와중에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군상들의 삶과 룰, 의리와 배신 등을 볼 수 있다. 소설 곳곳에 쓴 웃음을 지을 수 있는 포인트도 있어서 블랙코미디의 맛까지 잘 살려 놓았다. 번역도 말끔해서 읽는 동안 외국소설을 읽는 거부감도 없다. 처음 읽은 중국 현대소설인데.. 잘 골랐다.
★★★★☆
사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인물이 헷갈려서 뒤에 가면 '이게 누구더라'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인물에 대한 기억력이 딸려서 고생하는 나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이름 적고 관계도를 그리면서 읽을 수밖에. 하지만 잘 갈무리하면서 읽으면서 인물들에 익숙해지면 긴장감이 고조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대체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열하기도 하고 속고 속이는 등 의리도 없는데다 폭력을 휘두르고 칼질까지 난무해서 섬뜩할 때도 있지만 인물들의 배경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기 때문에 행동이 이해되기도 하고 정감이 간다. 그나저나 불쌍한 양지. ㅠㅠ 고자라니...
좀 두껍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추천. 그런데 절판된 것 같으니 책을 구하기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류전윈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으니 작가를 잘 기억해 두고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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