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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비밀 秘密》 히가시노 게이고 東野圭吾 / 인생을 리셋한 한 여자의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고 후.. 바뀌었다

스기타 나오코는 듬직한 엔지니어인 남편 헤이스케와 똑똑하고 귀여운 딸 모나미가 있다. 어느날 나오코와 모나미는 훗카이도에 있는 외갓집에 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가던 중 버스가 낭떠러지로 추락해서 생명이 경각에 이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나오코는 눈을 뜬다. 눈을 뜨니 헤이스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눈빛이 좀 이상하다. 나오코가 얘기를 할 때마다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오코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정신은 나오코의 것인데, 몸이 초등학생인 모나미이다. 그리고 나오코의 몸은 죽었다. 나오코의 몸이 모나미의 몸에 빙의해서 깨어났고 모나미의 영혼은 사라졌다.

 

말도 안되는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에 헤이스케는 모나미의 몸을 차지한 나오코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나미라면 절대 알 수 없는 헤이스케와 나오코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말투, 버릇까지 같은 나오코를 보고 헤이스케는 살아난 모나미가 사실은 나오코라는 것을 믿게 되고 두 사람의 기묘한 가족생활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생활할 수 있을지 알았다. 모나미의 몸을 가진 나오코는 집안 일도 거르지 않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혼이 아내라고 해도 헤이스케는 딸의 모습을 한 나오코와 성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어른의 정신에 아이의 젊은 뇌를 가진 나오코는 학교성적이 쑥쑥 올라 의대 진학을 희망할 정도가 되었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은 학생으로 커갔다. 결국 헤이스케는 전화기에 도청장치까지 설치하며 나오코가 다른 남학생과 만나는 것을 막게 된다. 너무나 큰 난관에 처한 나오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 東野圭吾 (1958 ~ ) 일본의 소설가. 가장 인기있는 소설가 중 한 명.

오해가 있었던 소설

《비밀》은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서도 유명하기로는 몇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게이고의 소설을 잘 모르는 사람도 청순한 이미지를 가진 히로스에 료코가 어떤 아저씨와 굉장히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영화 《비밀》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일본문화 개방 후 가장 먼저 개봉한 영화 중 한 편으로 이 작품의 영향으로 히로스에 료코는 일본문화 개방 초창기 일본 여배우 중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지도를 갖게 됐다.

 

하지만 바로 그 이미지, 딸에게 빙의한 아내와 남편이라는 묘한 성적 긴장감. 이 이미지 때문에 그동안 이 소설을 읽지 않았었다. 굉장히 일본스러운 조금 꺼림찍한 성적 상상력이 싫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내내 두 사람의 육체관계의 긴장감으로 진행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편견이었다.

 

오지랖 넒은 답답한 남편 vs. 인생 리셋의 기회를 잡은 아내

헤이스케는 성실하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오지랖은 넓은 사람이다. 구태여 운전사의 아내를 만나러 갈 필요도 없고, 이혼한 전 아내를 찾아서 운전사의 죽음을 알려줄 필요까진 없는데 괜한 참견으로 답답함까지 느끼게 한다. 아마도 선의를 가진 성실한 사람이라는 성격을 보여주려고 하는 의도였을 것 같다. 이 오지랖 넓은 남편이 원래는 잘 알고 있었을 나오코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헤이스케는 불안해지고 딸인 모나미의 마음이 나오코의 마음과 교차하면서 불안함은 더 심해진다.

 

그런데 헤이스케보다 더 문제적 인물은 부인인 나오코다. 딸의 몸을 차지한 엄마라면 보통은 어떤 생각을 할까? 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나오코는 처음엔 안 그랬지만 굉장히 신박한 생각을 한 것 같다. 판단력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이미 장착되어 있는데 6학년 꼬마가 된 것이다. 보통 현재 내 의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릴 때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 번씩은 해 볼텐데, 나오코가 바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딸이 없어졌다는 슬픔과 남편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만 살짝 눈감아 버리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처음에는 그 의욕에 대한 미안함이 강했지만 도청사건 이후로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결국 영혼이 교차하는 것처럼 연기하고 시간이 흘러 어느날 나오코는 완전히 사라지고 모나미의 영혼만 남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헤이스케는 그런 나오코의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나오미가 결혼할 때 헤이스케가 실상을 알게 되지만 이미 어쩔 수가 없다.

 

나오코의 선택이 어쩔 수 없는 고민의 결과라는 점은 이해된다. 이미 남편과의 육체적 나이 차이가 30세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이스케가 모나미의 여자선생님과 잘 될 기회를 박차고 의리를 지킨 것을 생각하면 배신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관계가 틀어져서 생기는 긴장감

결국 《비밀》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부인과 그냥 평범하게 살던 삶을 그대로 사는 남편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이해될 수 없는 상대와 함께 살면서 생기는 긴장감이 주된 소재다. 두사람 다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관계가 유지될 수는 없다.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나미의 영혼이 되돌아 왔을 때부터 안전하고 모두 행복하게 결말이 날 듯 하지만 진짜 결말은 헤이스케에게 너무 잔혹하다. 자신의 부인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남편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소설도 유명하지만 영화도 유명하다.

★★★★

긴장감 넘치고 도대체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해서 단숨에 읽게 된다. 게이고의 소설답게 문장도 쉽고 책장도 잘 넘어간다. 결말에서는 충격적 반전보다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게이고의 소설 중에서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