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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le passe-muraille》 마르셀 에메 Marcel Ayme' /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상상력 넘치는 고전

어느날 갑자기..

그냥 어두운 방이었다. 뒤티유욀은 벽에 있는 스위치를 찾다가 밖으로 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충분히 '이성적인' 판단을 한 후 뒤티유욀은 자신이 벽을 통과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놀란 마음에 의사에게 갔더니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의 원인은 갑상선 협부 상피의 나선형 경화에 있다고 설명하고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라고 하면서 이상항 약을 복용하라고 하면서 준다. (어쩌면 흔한 병일지도 모르겠다)

 

뒤티유욀은 평범한 프랑스 시민이다. 당연히 '평범한' 시민이라면 생각할 법한 '평범한' 범죄를 저지른다. 우선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직장상사를 놀라게 해서 쫓아낸다. 이후 '평범하게' 은행을 털고 '평범하게'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평범하게' 탈옥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경찰에 화가나기도 하고 벽을 통과하는 삶도 지루해져서 신분을 숨기고 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결심의 순간, 한 금발미녀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 미녀는 이미 난폭한 남편과 결혼한 상태였다. 미녀의 남편은 항상 부인을 가두어 놓고 밖으로 나간다. 보통이라면 아내를 완벽하게 감금한 것이겠지만 벽을 통과할 수 있는 뒤티유욀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평범한 시민 뒤티유욀은 벽을 통과하여 미녀와 사랑을 나눈다. 뒤티유욀과 금발 미녀의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마르셀 에메 Marcel Ayme' 1902 ~ 1967 프랑스 소설가

제목이 유명한 책

제목이 굉장히 유명한 책이다. 유명한 이유는 아마도 뮤지컬 때문인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뮤지컬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 원전이 1950년대 프랑스 작가의 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 싶다. 프랑스 소설은 좀 읽기 어려울 거라는 편견이 있다. 일단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고(이건 이 책도 마찬가지다), '왠지' 책장 하나 넘기는 것조차 벅찰 것 같은 느낌이 그것이다. 굉장히 철학적일 것 같고 어려울 것 같다. 유명한 프랑스의 고전들이 모두 그러니 그런 편견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이라고 평생을 근엄하게 철학적 사유만 하고 살라는 법은 없다. (같은 이치로 독일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재미없는 얘기만 하지는 않을.. 이건 아닌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내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소설에 대한 편견을 확실히 깨뜨린 소설이다. 벽을 드나든다든지, 한달이 15일이 되기도 하고 35일이 되는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큰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극. 꼭 뮤지컬이 아니더라도 연극으로 옮겨놓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단편소설이 지녀야할 장점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소설집이다. 그리고 이런 환상적인 내용이 벌써 70년 전에 쓰였다는게 놀랍다.

 

환상소설만 있는 건 아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는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내용은 이미 위에 있고, <생존 시간카드>는 국가정책에 따라 한달에 살 수 있는 날짜가 달라진 세상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그려진다. 개인적으로는 <생존 시간 카드>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보다 더 좋다. <속담>은 아들의 숙제를 도와줬지만 점수가 더 나빠진 아빠의 얘기이고, <칠십 리 장화>는 모험을 꿈꾸는 가난한 아이와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 <천국에 간 집달리>는 진정한 선행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우화이다. 환상소설이 두 편, 일상소설이 두 편, 우화 한 편. 모두 재미있다. <속담>이나 <천국에 간 집달리>는 마치 안톤 체홉의 단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다섯 편 소설 중에서 역시 관심이 가는 소설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생존 시간 카드>. 지금이야 흔한 사물통과나 시간의 변동에 관한 에피소드지만 굉장히 70~80년 전 프랑스에서 이런 상상력을 가진 작가는 많지 않았을 것 같아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거나 억지같아 보이지 않는다.

 

다른 단편들은?

사실 내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은 건 적어도 20년도 전에 비슷하지만 다른 제목('벽을 통과하는 사나이'였던가?)으로 된 책을 읽었는데 다시 읽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앞의 두 에피소드는 이전에 읽었던 책에 포함되어 있어서 읽었었는데 나머지 세 편은 처음 읽었다. 읽었던 책은 환상소설만 6~7 편 실려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다른 단편들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책장 어딘가에 박혀 있는 책을 찾으려면 또 책장을 한 번 뒤집어야 해서 포기. 어쨌든 흥미로운 단편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마르셀 에메의 책을 한 번 주욱 살펴 봐야겠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벽을 뚫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뮤지컬이 제작되었고 지금까지 장기공연중이다. 벽을 통과하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

고전소설에 속하겠지만 각잡고 읽을 정도로 긴장할 필요는 없다. 상황을 상상하고 이후 전개가 무리없이 진행된다. 엉뚱한 상황에 대해 쿨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도 흥미롭다.

 

재미있다. 추천

 

P.S. <생존 시간 카드>에서 주인공이 6월 32일에 만난 엘리자가 왜 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예전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새로 읽었는데도 잘 이해가 안된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그 이유를 설명하실 수 있는 분은 좀 알려 주시길..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국내도서
저자 : 마르셀 에메(Marcel Ayme) / 이세욱역
출판 : 문학동네 200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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