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마
나는 김병수, 살인자다. 그것도 연쇄살인마이다. 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살인은 모두 완전범죄였기 때문이다. 큰 사고를 겪은 후에 나의 뇌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가족은 단 한 명. 은희는 친딸은 아니지만 소중한 내 딸이다. 마지막으로 죽였던 여자의 딸을 데려다 키웠다.
최근 내가 사는 마을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나는 범인이 누군지 안다. 박주태이다. 어느날 은희가 박주태를 데리고 왔다. 내 사위가 될 녀석이라고 한다. 아무도 박주태의 정체를 모른다. 나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은희를 지키려면 오랫동안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한 번 살인을 해야 할 것 같다.
문제가 있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기억이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는다. 문득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차리고 보면 주변의 상황이 이해못할 방향으로 흘러가 있다. 수첩과 녹음기로 기억을 붙들어 두려고 하지만 불안하다. 오로지 내가 붙잡고 있는 기억은 하나 뿐. 은희를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주태를 죽여야 한다.
과격한 소재.. 긴박한 전개..
소재가 흥미롭다.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기억을 잃고 있어가는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인 김병수이다. 김병수의 생각을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김병수가 보는 것만 볼 수 있고, 기억하는 것만 기억할 수 있다. 연쇄살인마, 알츠하이머, 또다른 연쇄살인마, 자신이 살해한 여자의 딸을 입양해서 키우는 등 온갖 과격한 소재는 끌어 모았다. 연쇄살인마가 또다른 연쇄살인마로부터 자신의 딸을 지켜야 한다. 굉장히 긴박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글을 읽는 사람 역시 긴박한 흐름에 금세 동화되어 버린다.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한 문단씩 끊어서 글을 써 놓았기 때문에 호흡이 굉장히 짧다. 기억이 단절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찾은 방법인 것 같다. (김영하의 작품은 처음 읽는 것이라 다른 소설은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잘 모른다.)
틈틈히 섞여 있는 블랙 유머
김병수는 연쇄살인마였지만 시적 재능이 뛰어나다. 심지어는 시를 가르치는 강사로부터 시를 직접 쓴 것이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시를 쓰는데 재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김병수가 쓴 많은 시들은 사실은 살인의 경험을 통해서 쓴 시이다. 상징이 아니라 실재이다. 게다가 연쇄살인마 주제에 불경을 읽는다. 인간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거기에 기억의 모순까지 더해진다. 이 부분에서 블랙 유머가 발생한다.
책장에서 괜찮은 시를 발견했다.
감탄하여 읽고 또 읽으며 외우려 애썼는데, 알고 보니 내가 쓴 시였다.
P. 96
노골적으로 반전을 암시한다
치매, 알츠하이머 혹은 기억상실증. 기억을 소재로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극적인 반전이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딱히 반전이 있다는 점을 숨기려 하고 있지도 않다. 이런 경우 작가는 굉장히 큰 부담감을 갖게 될 것 같은데, 독자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반전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뻔한 반전이라면 읽은 사람이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상해 본 반전은 이렇다.
1. 은희는 병수의 정체를 알고 있으며, 병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딸노릇을 하고 있다.
2. 사실은 새로 나타난 연쇄살인범은 병수이며, 살인을 한 후에 그 기억을 잊은 것이다.
3. 박주태와 은희는 사실 병수의 범행을 알고 있으며, 범행의 뒷처리를 해 주고 있다.
그런데..
기억이 왜곡되었다고..????
내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다른 방향으로 결말이 났다. 잊은 기억의 간극을 메우면서 반전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예상을 했는데, 작가는 엉뚱하게도 기억이 왜곡되었다는 것으로 결말을 만들었다. 결말까지 읽은 후에 나는 작가가 독자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게임의 룰을 어겼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주인공은 기억을 하거나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룰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갑자기 기억이 왜곡되었다고 한다. 병수는 치매환자이지 조현병 환자가 아니다.
소설을 작가가 창조한 세계라 하더라도 그 세계 속에 만들어 놓은 룰은 지켜야 개연성이 생기는 것인데, 이 책은 전체의 80%와 마지막 20%의 룰이 다르다. 그래서 결말에 대해서는 실망이 크다. 반전이 뒤통수를 치지 못해서가 아니다. 룰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 속의 사족
큰 의미는 두지 말고 스릴러 읽듯이 읽으면 된다. 마지막에 작가가 다른 소설에서 쓴 말을 평론가가 인용한 말이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해당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좀 웃기고 가소롭다. 소설은 작가의 손을 떠나서 독자에게 넘어가는 순간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학술서적도 아닌데 어떻게 잘못 읽을 수 있다는 건지. 무지하고 이해력이 딸리는 독자를 계몽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재미있게 읽고 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평론이 왜 책 말미에 붙어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만약 작가가 독자를 대하는 태도가 항상 이런 식이라면 김영하의 책은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몰입감도 뛰어나다. 호흡이 굉장히 짧고 길이도 짧고 지루할 틈이 없기 때문에 인터넷의 자극적인 글에 익숙하고 호흡이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추천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두가지 부분, 결말과 책 속에 있는 평론은 불만스럽다.
TV도 보지 않고, 베스트셀러를 찾아 읽지도 않고, 그동안 한국소설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김영하라는 작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조사해 보니 유명한 사람이더라.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인기도 많아졌고, 유명한 문학상도 많이 탔다. 영화가 나오는지도 몰랐는데 검색하다 보니 영화 포스터가 먼저 나온다. 그렇게 대단하고 유명한 소설가라면 이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 그의 대표작은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다른 책을 한 권 정도는 더 읽어 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
감히 말하건대, 이 소설을 어렵지 않게 읽었지만 잘못 읽은 것은 아니길 바란다.
|
'독서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일야화>> 앙투안 갈랑 Antoine Galland / 어릴적 친구였던 알라딘과 신드바드, 알리바바를 다시 만나는 즐거움 (0) | 2019.05.19 |
---|---|
<<오리진 Origin>> 댄 브라운 Dan Brown / 이제는 좀 바꿔도 좋을 변주곡 (0) | 2019.05.19 |
<<모모>> 미하엘 엔데 Michael Ende / 아무튼 모모한테 가보자 (0) | 2019.05.19 |
<<7년의 밤>> 정유정 / 소심한 가해자를 노리는 잔혹한 피해자 (0) | 2019.05.18 |
<<고래>> 천명관 /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 (0) | 2019.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