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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고래>> 천명관 /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

이 소설은 벽돌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성적인 소재와 잔혹한 장면이 나와서 불편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워낙 재미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손에 잡는 순간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갑니다. 이 포스팅은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이 소설의 정체는 뭐지?

이 책은 위에 인용해 놓은 뜬금없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춘희는 당연히 주인공의 이름겠지. 마치 옛날 극장의 연사가 툭 내뱉듯이 던지는 말같은 저 첫 문장이 마지막까지 책을 읽은 후 다시 읽으면 굉장히 감회가 새로워진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만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춘희로부터 시작한다. 왜 갔다 왔는지 모르는 120KG의 춘희가 벽돌공장에 떡하니 등장을 한다. 말도 못하는 벙어리인데다가 정신까지 오락가락한다. 빡빡 깎은 머리로 프로필 사진을 떡하니 던져 놓고,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데다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칭송받는 천명관 작가가 쓴 <<고래>>를 이렇게 처음 접하게 됐다.

 

지은이는 천명관. 2004년에 출간되었고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금복이의 일대기

아빠와 단 둘이 살던 금복이는 생선장수를 따라 아빠를 버리고 도망간다. (춘희의 이야기인데 왜 갑자기 금복이가 나왔는지는 따지지 말자. 원래 옛날 이야기가 다 그런거 아니겠어?) 금복이가 떠난 후 아빠는 죽고, 금복이와 생선장수는 부둣가에서 생선을 말려 팔아 큰 돈을 번다. 부둣가에 처음 왔을 때, 금복이는 강간을 당할 뻔 했는데 이 때 금복이를 구해 준 사람이 '걱정'(사람 이름)이다.자리를 잡은 후 금복이는 걱정과 다시 만나고,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금복이는 걱정과 살림을 차리고 생선장수는 망한다.

부둣가의 주먹패의 보스였던 칼자국(별명이다)은 금복이를 보자 이전에 사랑했던 일본 기생이 생각나 사랑에 빠지고, 걱정은 미련하게 힘자랑하다가 반병신이 되어 버린다. 금복이는 걱정의 병수발을 하기 위해 칼자국의 집으로 걱정과 함께 들어가고, 당연히 칼자국과 걱정 몰래 한 이불을 쓰게 된다. 이를 알아챈 걱정은 바닷가에 몸을 던지고, 하필 칼자국이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 금복이가 그걸 또 목격했다. 칼자국이 걱정을 죽였다고 오해한 금복이가 칼자국도 죽여 버린다.
이런 식이다. 금복이하고 연관된 남자들은 죽던지 망하던지 인생을 망쳐 버린다. 

 

엄청난 몰입력을 자랑하는 최고의 이야기인데 말은 안돼!

정말 재미있다. 보통은 소설을 읽으면 처음 몇십 페이지는 소설의 배경이 나오게 되는데, 이 부분이 지루할 때가 많다. 배경을 머리속에 잘 넣어 두지 않으면 한참 읽다가 다시 앞으로 와서 확인하고 읽어야 할 때도 있다. <<고래>>는 그런 거 없다. 그냥 시작하자마자 마구 달린다. 뒤돌아 볼 겨를이라고는 없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수밖에 없다. 하도 흥미진진해서 앞의 얘기를 까먹을 수 있지만 크게 상관없다. 그냥 작가가 썰을 푸는대로 쫓아 가면 된다.


썰을 푼다는 말이 참 적절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 것 같은데 말도 안되기 때문이다. 걱정이 죽을 때 몸무게가 무려 1톤이다. 금복이는 걱정과 칼자국이 죽은 후 4년여간 떠돌아 다니면서 여기저기서 몸을 굴린다. 그리고는 아이를 낳는데 그게 춘희다. 태어날 때 7KG이란다. 이것도 말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치자. 한술 더 떠서 춘희가 걱정을 닮았다. 걱정이 죽은지 4년이라니까! 어처구니없는 건 작가는 춘희가 걱정의 씨를 받아 태어난 것처럼 어물쩡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걱정을 아는 사람들은 춘희를 보자마자 걱정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 챈다. 걱정의 애가 아니라니까! 이런 식이다. 혹시 잘못 읽었나 해서 다시 돌아가서 봤다. 아닌게 맞다. 뻔뻔하기 이를데 없는 작가다.

 

제목이 왜 고래냐구? 금복이가 부두에서 처음 보고 감명을 받았고, 평대에 지은 극장 모양이 고래 모양이다. 평대가 어디일까?

툇마루에서 들었을 것 같은 이야기

말도 안되는 얘기들이 마구 펼쳐진다. 고래는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장으로 넘어가면 더 가관이다. 작가가 훨씬 더 많이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해설을 한다. 앞에 나왔던 인물을 까먹었을 것 같으면, '설마 누구누구를 잊은 건 아니겠지?'라며 뻔뻔하게 이야기 속으로 침입한다. 툇마루에 마을 아낙네들이 앉아 있다. 동네에 색기 넘치는 과부가 한 명 있다. 얼마나 뒷소문히 무성할까. 얘기를 하다 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두고 뒤에서 쑥덕거리는 것처럼 재미있는게 또 없다. 고래는 그런 이야기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애딸린 여자가 갑자기 부자가 되니까 여기저기서 쑥덕거린 기록같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재미있다.

 

구비문학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표현들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동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

칼자국을 표현하는 말이다. 엄청나게 길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표현이 7번이 나온다(6번이던가?).

 

그는 한껏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언제나 소문과 함께 장식처럼 따라다니는 변명들을 장황하게 섞어, 예컨대, 자신은 결코 입이 싼 사람이 아니며. <중간 생략> 병을 주는 동시에 약을 주는 요사스런 화법으로 그 수상한 소문을 전했을 때, 文은 그 자리에서 소문을 전한 인부를 당장에 해고해 버리고 말았다.
p. 223~224

한 인부가 바람난 금복이를 당시의 남편인 文에게 일러 바치는 장면인데, 무려 한페이지를 한 문장으로 주절거리고 있다. 이건 그냥 이야기다. 여기저기 떠돌던 이야기를 말솜씨 좋은 사람이 살을 붙여서 풀어 놓는다.

 

천명관. 이 책을 읽고 책 두 권을 더 주문했다.

고래는 읽으면서도 정말 할 얘기가 많다. 내용 자체도 재미있는데다가 표현도 그동안 봐왔던 소설들과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 얘기를 다 쓰려고 하다 보면 소설만큼 써야 할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 둬야겠다.
그래도 꼭 덧붙이고 싶은 건 있다. 춘희가 너무 불쌍하다. 그리고 춘희가 낳은 아이는 설마 살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마저 죽여 버렸다. 책을 읽다가 입에서 쌍욕이 나왔다. 애는 살려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가장 울컥했던 장면은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가 춘희가 만들어 놓은 벽돌을 찾았을 때였다. 그냥 춘희가 만들어 놓은 벽돌이 인정을 받았다는게 너무 기뻤다.

 

최근 몇년동안 책을 읽다가 눈물이 맺힌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책을 보면서 온갖 쌍욕을 해가면서, 얼굴을 찡그렸다가 펴고, 울컥해서 맺힌 눈물을 닦으면서 읽었다. 금복이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궁금해? 어째서 춘희가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는지 궁금해? 120KG이나 되는 여자의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궁금해?

 

반드시 읽어 보는 걸 한 번 더 추천한다.

 

* 이 포스팅은 티스토리를 다시 시작하면서 이전에 썼던 것을 다시 쓴 글입니다.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국내도서
저자 : 천명관
출판 : 문학동네 200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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