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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고령화 가족 / 천명관》 참을 수 없는 찌질함의 가벼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아니, 어쩌면 네 가족일지도 모른다. 오인모는 단 한 순간도 전도유망해 본 적이 없는 실패한 영화감독이다. 입봉작에서 제작자에 20억이 넘는 손해를 끼치고 다시는 영화를 만들 기회를 잡지 못하고 10년이 넘는 세월을 충무로 난민으로 살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생활을 하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엄마 집으로 들어간다.

 

엄마는 형과 함께 살고 있다. 오인모도 그다지 볼 것 없는 막장 인생이지만 형은 개막장이다. 이미 중고등학교 때부터 평범하지 않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살인만 빼고 할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저지르며 큰집을 들락날락하더니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을 밑천으로 운영하던 당구장을 미성년자 강간에 대한 합의금으로 날려 먹고 오인모보다 먼저 엄마 집에 들어와 빌붙어 있다. 형은 오한모이다. 하지만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생각 따위는 없다. 그저 오함마일 뿐..

 

그나마 사람답게 사는 건 막내 오미연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만만치 않다. 살던 동네에서 오미연과 붙어먹지 않은 남자가 없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바람을 피우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어느날 갑자기 스윽 엄마 집에 들어 왔다. 그것도 싸가지라고는 밥말아 먹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개싸가지 여중생 딸까지 혹처럼 달고 말이다. 그나마 돈을 벌어 생활비를 내는 건 오미연 뿐이다.

 

가족이 모두 모였다. 오함마 52, 오인모 48, 오미연 45, 장인경 16. 가족 평균나이가 49라는게 좀 사소한 문제다.

천명관. 1964 ~ . 소설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찌질함

천명관의 소설은 두 권을 읽었다. 천명관이 쓴 모든 책을 가지고 있지만 좀 아껴가면서 읽는 것도 있고, 어쨌든 이름만 보고 무조건 책을 구매하는 한국작가 몇 명 중에 한 명이 천명관인데 아무래도 《고래》를 읽고 천명관에게 반한 게 그 이유다.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살짝 믿기 힘든데 작가마저도 숨기지 않게 서사를 풀어나가는 뻔뻔함. 최고의 이야기꾼 천명관의 소설은 이름만으로도 기대된다.

 

《고령화 가족》은 한 어머니가 2남1녀와 손녀 한 명을 거두어 먹이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세 명의 자식새끼들이 자기 스스로 앞가림하는 녀석이 없다. 기본적으로 경제능력은 전무라고 할 정도다. 어머니가 거둬 먹이지 않으면 실제로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을 정도다.

...

경제능력이야 운이 나빠서 어쩔수 없다치고 (그러고 싶지 않지만) 넘어가 보자. 그렇다 해도 이들을 (여기서도 막내는 빼자) 변호하기는 너무 어렵다. 좀 성숙한 중학생만 돼도 하지 않을 개유치한 행동들을 진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툭하면 형제간에 주먹질과 욕을 교환하고, 식탐을 부리고 차마 40~50대 남자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다. 단지 유치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더럽기까지 하다. 큰 삼촌은 조카 팬티를 쥐고 자위를 한다.(물론 의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가족 팬티인 건 틀림없다.) 작은 삼촌은 조카의 약점을 잡아 용돈의 절반을 삥뜯는다. 현실에서 부딪힐까봐 무서운 가족이고 형제다.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은 이제 많이 해체된 것 같다. 《고령화 가족》에서는 난장판같은 가족 관계 속에서도 결국은 하나의 가족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인 듯, 가족아닌, 가족같은..

반푼이같은 자식들을 한없이 품어 주는 엄마. 하지만 그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가진 엄마까지 젊은 시절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애를 안고 다시 돌아온 사실이 알려지며 이 가족의 마지막 보루였던 엄마마저 무너진다. 가족이라는 말로 묶여 있지만 이 가족은 정확하게는 하나의 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다. 첫째는 아빠와 전처의 아들, 둘때는 아빠와 엄마의 아들, 셋째는 엄마와 바람난 남자의 딸, 즉, 첫째와 셋째는 아예 피가 섞이지도 않았다. 《고령화 가족》은 내내 가족같지 않은 가족의 불화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언제 망가질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더니 모래알같은 가족의 구조를 다 밝힌 후에는 오히려 가족애가 끈끈해 진다. 첫째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조카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다 해외로 튀고, 둘째는 원수같던 형의 소재를 숨기기 위해 얻어맞아 절름발이가 된다. 놀라운 건 쓰레기같던 세 남매가 각자 딱 맞는 배필을 만나 그럴듯한 가정을 꾸민다는 것이다. (물론 얼마나 오래 갈지는 소설이 끝이 나버릴 때까지 알 수 없다.)

 

전통적인 모습이 해체된 가족 속 가족애

《고령화 가족》의 가족은 우리 머릿속에 이미지화되어 있는 이상적인 가족도, 단란한 가족도 아니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다정한 말이 오가는 일도 거의 없다. 마치 현대사회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진 가족의 씁쓸함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모두들 새로운 가족을 이루어 낸다. 결국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는 '가족'이라는 것이 천명관이 드러내고 싶은 가치관이었을까? 온갖 형태의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가 부상하는 현대에 한 번쯤 돌이켜 생각해 볼 법하다.

검색을 하다 보니 2003년에 영화화된 것을 알게 됐다. 출연진도 괜찮고 넷플릭스에 있으니 조만간 시간내서 볼 예정.

★★★★☆

천명관의 《고래》는 내가 읽은 소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최고로 꼽는 작품이다. 《고령화 가족》은 화자의 말투가 바뀌어 구비문학을 전승한 것 같던 《고래》에서처럼 귀에 들러붙는 맛은 없이 훨씬 정제되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두런두런 남의 집 흉보는 모습이 보이는 등 이전 소설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도 한다. 결국 천명관의 소설이다.

 

재미있게 술술 읽히고 생각해 볼 틈도 많다.

 

강력히 추천한다.

고령화 가족
국내도서
저자 : 천명관
출판 : 문학동네 201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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