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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라틴어 수업> 한동일 / 강의를 기대했는데 조언을 얻다

라틴어, 동경의 대상

취미로 전각을 하고 있다. 전각은 도장을 새기는 것이다. 당연히 전각칼을 이용해서 돌에 글자를 새기는 기술이 중요하다. 그런데 새기는 기술도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기술은 결국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글자를 알아야 하고 예술적으로 배치를 잘해야 한다. 전각에 사용하는 한자는 가장 오래된 형태인 전서이다. 전서는 대전과 소전, 크게 2가지로 나뉘고 여러가지 이형(異形)이 있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만만치 않다. 전각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한자와 한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때는 좀 깊이있게 공부를 하려고 하기도 했다. 영어 공부를 깊이 있게 공부하려고 하면 항상 부딪히는 것이 어원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더듬어서 찾아가다 보면 항상 끝에는 라틴어가 도사리고 있다. 번역된 서양의 고전을 읽다 보면 원서로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원서는 결국은 라틴어로 되어 있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 원서를 읽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를 익힌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일반인에게 라틴어는 이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알면 좋을 것 같지만, 절대로 익힐 수 없는 동경의 대상.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다.

 

저자 한동일.

강의를 책으로 옮겨 놓다

저자의 약력을 보니 대단하다. 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의 대법원인 로마 로타나의 변호사를 지냈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바티칸은 이탈리아어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라틴어가 공용어이다. 그냥 라틴어를 할 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법원에서 변호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라틴어에 대한 이해도만큼은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뜻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우연히 라틴어 강의를 한 번 맡았다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계속해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강의는 예상외로 큰 인기를 끌었고, 청강생이 들어 올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강의의 기록이다.

 

책을 읽으니 한동일 교수는 굉장히 친절한 안내자인 것 같다. 책 속에 강의하는 교수의 따뜻함이 잔뜩 묻어 있다. 깐깐하게 동사변화를 칠판에 잔뜩 써 놓고 '외워!'라고 강압적으로 강의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게다가 책 말미에 있는 제자들의 편지를 보면 수업을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저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분명히 멋진 사람일 것이다.

 

라틴어는 서양문화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결국은 벽으로 다가온다. 고전을 공부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동양의 한문과 같은 존재.

라틴어를 던져 놓고 인생을 풀다

강의 형식으로 쓴 책이다. 각 단원마다 라틴어로 한 문장을 적어 놓고 그 라틴어와 관련이 있는 내용을 풀어 놓았다. 라틴어가 체계적이면서 굉장히 어려운 언어라는 건 처음 나오는 'do'라는 동사의 동사변화표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대충 세어 봐도 변화형이 150개가 넘는다. 라틴어에 관한 호감을 끊어 버리고 책을 시작한다. 책은 라틴어와 간단한 어원이나 로마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에 따른 인생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라틴어에 관심이 전혀 없어도 읽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이 책은 라틴어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인생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을 한다.

 

로마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서양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라틴어는 로마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언어이다.

기대와는 사뭇 다른 책의 내용

다른 사람은 어떤 이유로 이 책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라틴어에 대해서 공부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라틴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인문학적인 지식과 함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책을 원했다. 읽기 전에는 라틴어 지식(2) + 인문학적 지식(6) +그 외의 이야기(2) 정도를 기대했는데, 책은 라틴어지식(2) + 인문학지식(2) + 인생이야기(6)였다. 읽어가면서 처음에 가지고 있던 기대감은 조금씩 실망감으로 바뀌어 갔다.

 

깊이있게 읽을 수 있는 인문학 서적을 원했는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인생지침서를 읽은 셈이 됐다. 그런 책을 원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책이다. 게다가 저자가 카톨릭 신자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언뜻 보이는 이슬람교에 대한 편견 어린 비판은 굉장히 불편했다. 인문학 책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자기계발서나 인생지침서에 훨씬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Carpe Diem. 영어로는 Seize The Day로 번역하고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라틴어 구절 중에 한 마디로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로 인해 많이 알려졌다. 책 속에서는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가장 먼저 쓴 말이라고 설명을 한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YOLO라는 말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좋은 수업과 훌륭한 인격, 하지만 책은..

위에사 밝힌 것처럼 난 이 책의 저자가 굉장히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이 수업이 굉장히 좋은 수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많은 학생들이 저자의 수업에 감동을 받고, 인생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수업중에 공감과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친절하고 흥미있는 강의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좋은 얘기를 많이 하지만 결국 결론은 '공부하라'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이다. 책에 있는 조언도 라틴어가 섞여 있어서 그렇지 굉장히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조언들이다. 새삼스럽지 않다. 진리는 항상 가까운데 있고, 쉬운 것이라고 누군가 얘기를 한다면 나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쉬운 것을 알기 위해서 꼭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아마도 내가 이 수업을 들었다면 한동일 교수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만 읽은 입장에서는 한동일 작가의 팬이 되기는 힘들 것 같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인생지침서를 읽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이 책을 읽어도 괜찮다. 분명히 이 책에는 어정쩡한 자기계발서나 인생지침서보다는 훌륭한 점이 있다. 하지만 지적인 자극을 받고 싶다거나 라틴어를 익히지는 않더라도 라틴어나 로마문화에 대한 어느 정도 이상의 이해를 원하는 사람은 읽을 필요가 없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만족감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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