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일본 소설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소설가라고 하면 누구를 제일 먼저 떠올릴까? 노벨상을 수상한 양대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를 생각할까? 많은 문학상 수상작가들이 쓴 책이 그렇듯 이 두 사람은 유명하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고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질문을 바꿔 보자. 현재 시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인 읽는 작품을 쓴 일본 소설가는 누구일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을 피해가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와 히가시노 게이고이다. 거칠게 비교해 보면 하루키가 순수문학에 가까우면서 몇 년에 한 번씩 신중하게 책을 내는 편이라면 게이고는 장르소설을 일년에도 무서울 정도로 몇 편씩 쏟아내는 다작 작가이다. 두 사람의 우열을 가랠 생각은 없고 기준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읽은 일본 작가'라고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승리다. 작품의 질과는 상관없이 가장 많은 소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쉽고 재미지만 편차가 심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소설은 읽기 쉽고 몰입감이 뛰어나다 문장도 어렵지 않고 인물관계, 사건들도 쓸데없이 꾜여 있지 않아서 머리가 복잡하지 않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백 페이지 정도는 금세 읽을 수 있고 책 속으로 깊숙히 빠져 들어간다. 나같은 경우는 어려운 책을 읽고난 후 머리가 복잡할 때 머리 식힐 겸 게이고의 소설을 읽는다. 무척 재미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대체로 추리물이 많은데 의도적으로 마지막 반전을 염두에 두고 쓴 책들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게이고의 소설을 읽으면서 반전에 재미를 느낀 적이 많지는 않다. 반전을 만들어 놓기 위해 플롯을 억지로 짜내는 듯한 느낌이 든 책이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미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 탐정(포지션)과 범인이 머리 싸움을 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는 작품이 더 좋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워낙 다작을 하는 작가다. 한 해에도 몇 편씩 소설을 발표하고 현재까지 쓴 소설이 80편이 넘는다고 한다. 발표하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도 대단하지만 순식간에 써내는 속도도 경이적이다. 하도 소설을 많이 발표하는 바람에 혹시라도 고스트 라이터가 있는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아는 일본 지인(히가시노 게이고의 광팬이다)에게 그 얘기를 했다가 거하게 욕을 먹었다. 소설이 워낙 많다 보니 모든 소설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작품의 편차가 좀 심한 편인데 대체로 단편집보다는 장편이 나은 편이고 각 시리즈별로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 한 편씩 있는 것 같다.
이제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다섯 편을 꼽아 보려고 한다. 참고로 게이고의 소설을 약 30 편 정도 읽었고 재미있다고 소문난 소설을 모두 읽지도 못했다. 어차피 모든 소설을 다 읽기 힘들다면 이왕이면 좋은 작품을 골라 읽는 것이 나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만 읽을 수는 없으니.. 아래 리스트는 순위는 없고 완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타임슬립 판타지, 한국 1위
제일 먼저 추천하는 소설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다. 가장 먼저 읽은 책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게이고의 소설 투탑 중에 한 권이다. '나미야 잡화점'을 중심으로 수십년의 시간을 두고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면서 고민상담과 답장을 하고, 그 과정에서 과거 인물들이 고민이 해결되는 일종의 타임슬립물이다. 다섯 편의 단편이 '나미야 잡화점'을 매개로 이어져 있는 옴니버스식 단편소설집이기도 하다. 게이고의 단편은 대체로 만족스럽지 않은데 이 작품은 한 편 한 편 감동적이기도 하고 각 단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짜임새도 좋다. 읽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데 살인이 난무하는 게이고의 다른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게이고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던 것 같다. 시리즈물이 아닌 단권으로 끝난다.
《용의자 X의 헌신》 본격 추리, 일본 1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투탑 중에 한 편이라고 했다. 그럼 다른 한 편은? 《용의자 X의 헌신》을 다른 한 권으로 꼽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게이고의 유명한 두 시리즈 중 한 시리즈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천재 물리학과 조교수인 유가와 마나부가 활약하는 소설이다. 게이고가 원래 공학도이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서 과학적인 소재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나부는 과학지식을 이용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서는 과학적인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수학교사이자 마나부와 같은 대학 동기인 또다른 천재, 이시가미 데츠야가 만들어 놓은 트릭을 마나부가 풀어나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두 천재가 펼치는 두뇌게임, 게이고의 소설 중 추리가 풀리는 과정에서 가장 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악의》 심리 추리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유명 두 개 시리즈물의 주인공 중 한명인 가가 교이치로 형사. 가가 형사는 추리도 추리지만 끈질기게 발로 뛰며 사건을 밝혀내는 민완형사에 가깝다. 따라서 갈릴레오가 번뜩이는 두뇌로 순식간에 사건의 본질에 다가간다면 가가 형사는 성실하게 추적해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제거해 나가면서 사건의 본질을 파악해 나가는 성실한 타입을 가진 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는 그런 가가 형사의 끈질긴 면이 가장 잘 표현된 대표작인데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는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원인을 밝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끈질긴 가가 형사(마치 콜롬보 형사같은)에 짜증내면서 궁지에 몰리는 범인의 모습이 흥미롭다.
《백야행》 미스터리, 추리
단편으로 끝나는 책이면서 1, 2 두 권으로 되어 있어서 소개한 책 중에 가장 길다. 전당포 주인이 죽은 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주변 사람들이 엮이면서 해결되지 못한 사건을 쫒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건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후일 두 아이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보다는 영악한 여자 아이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며 커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책을 끝까지 읽어도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던 두 소년소녀가 공모하는 모습 따위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심증밖에 남지 않는다. 심지어는 여자가 정말 범인인지 시원하게 밝혀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정확한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는다. 수십년에 걸친 범죄의 흔적을 쫒는 사람들과 추적을 피해 완벽한 범죄 속에 숨는 한 여자의 일대기. 마지막 아무렇지도 않게 퇴장하는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라플라스의 마녀》 SF 판타지, 추리
뇌수술에 의해 사건의 인과율을 통달한 소년, 그리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같은 능력을 얻어 그 소년을 구하려는 소녀. 《라플라스의 마녀》는 추리소설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범위에 답이 있기 때문에 추리소설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SF소설의 범주에 넣는것이 그나마 적절해 보인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소재로 사용하여 멋진 소설을 써냈는데,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외에 공대 출신이라는 게이고의 장점이 충분히 살아 있는 소설이다. 다른 소설과는 좀 다른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여 성공한 소설. 기발한 아이디어가 빛난다. 이후 후속편이 나오면서 시리즈물의 길을 걷고 있다.
물론 이 리스트가 맘에 안드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 것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참고가 된다면 좋겠다. 참고로 평이 좋은 《편지》와 《비밀》을 읽어 보지 않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데 나중의 재미를 위해 남겨두는 걸로..
당연히 다섯 편 모두 추천한다.
<부록: 일본에서 인기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10선>
1위: 용의자 X의 헌신
2위: 백야행
3위: 유성의 인연
4위: 신참자
5위: 매스커레이드 호텔
6위: 편지
7위: 비밀
8위: 붉은 손가락
9위: 도키오
10위: 한여름의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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