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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 그리움 가득한 SF단편집

공생가설

류드밀라 나보코프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나보코프는 멋진 그림을 많이 그렸다. 평생동안 그린 나보코프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나보코프가 그린 그림이 이상하다. 한 행성의 풍경을 연작으로 그린 그림은 마치 어딘가에 있는 현실세계같다. 그림을 모두 모아 3D로 시뮬레이션하니 누구도 본 적 없는 완벽한 행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행성의 이름을 류드밀라 행성이라고 이름짓고 나보코프가 가진 천재적인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코프가 죽은 후 류드밀라 행성과 같은 모습을 한 행성이 관측되었다.

 

윤수빈과 한나는 '뇌의 해석 연구소'에서 일하는 연구원이다. 연구소에서 영유아들의 뇌를 분석하던 중 아이들이 할 법하지 않은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아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어 아이들의 뇌속에서 서로 대화를 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그 존재를 '그들'이라고 이름지은 후 계속해서 아이들의 뇌를 관찰한다. 관찰한 결과 '그들'은 아이들의 뇌 속에서 지적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을 알게 되고 일곱 살이 넘으면 뇌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류드밀라 행성이 발견되었을 때 동요가 큰 뇌파를 그리며 류드밀라를 그리워한다.

 

김초엽. 1993 ~ .

젊은 신예 SF작가

SF에 관심이 많지만 한국 SF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김초엽이라는 이름은 꽤 익숙하다. 일년 전쯤 국내 SF계에 미안한 마음에 구매해서 읽었던 단편 모음집에서 처음 그 이름을 접했고 얼마전부터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도 책이 오르고, 책 좋아하는 소셜 미디어 친구들이 책을 계속 포스팅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웠는데, 이게 상징적으로 지은 제목인지, 상대성이론의 헛점을 파헤쳐 상상력을 발휘한 것인지 궁금해서 읽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감성적인 문장 속에 실어 놓은 SF 상상력

SF 소설은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했는지'와 '그 상상력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표현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책이 재미있어도 아이디어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으면 좋은 SF소설이라고 하기 힘들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아이디어 측면에서 상당히 만족스럽다. 생명공학을 이용해서 낙원행성을 만든 과학자, 문자를 색상으로 표현하는 외계인, 유아기에 인간의 성장을 돕고 자아가 형성되면 사라지는 외계인의 정신 등 멋진 아이디어를 잘 발전시킨 단편들이 계속된다.

 

김초엽은 이 아이디어를 잘 살려서 대체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후 그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은 진행하는데 플롯이 잘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다. 쓸데없이 아이디어를 심하게 숨겨두지 않고 적절하게 궁금증을 풀어주기 때문에 머릿속이 너무 헝클어지기 전에 끝이 난다. 그래서 읽는 동안 머릿 속이 크게 복잡하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다. 작품 중에서 가장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다. 웜홀이 존재한다 해도 웜홀을 움직일 수 없다면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우연히 화이트홀이 있는 곳으로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는데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슬픈 이별을 잘 표현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온통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가득하다.

 

작품 속에 면면히 흐르는 그리움의 감성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굉장히 감성적이다. 그렇게 느껴지는 첫번째 이유는 SF소설답지 않게 섬세하고 따뜻한 문장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감성터지는 이유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그리움의 정서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데이지는 낙원의 기원인 시초지라고 불리는 지구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지구인들을 그리워한다. <스펙트럼>의 할머니인 희진 역시 우연히 도착했던 루이의 행성을 그리워 한다. 심지어 그들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저 넓은 우주를 10년동안이나 홀로 떠돈다. <공생가설>은 그리움의 끝판왕이다. 이미 멸망한 것이 틀림없는 류드밀라의 행성인들은 정신만이 총합적인 모습으로 인간의 공통 정신 속에 숨어산다. 끊임없이 자신들이 탄생했던 고향인 류드밀라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불의의 사고로 가족과 헤어진 안나의 가족에 대해, <관내분실>은 죽을 때까지 남처럼 살았던 엄마에 대해,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어릴 때부터 영웅이었던 이모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따라간다.

 

온통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해서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에 잠깐이라도 마음을 추스리며 읽게 된다. 그런데 김초엽은 이 모든 그리움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어떤 작품 하나 반갑게 만나면서 행복하게 끝나는 단편이 없다. 억지로 떼어놓고 오랜 시간 그리워하게 하더니 만남을 주선하지는 않는다. 따뜻해 보이는 악마.

 

<관내분실>에서는 죽기전 사람의 뇌구조를 그대로 업로드하여 도서관에 저장한다.

★★★★

지금까지 읽었던 한국의 SF소설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읽었다. 아이디어도 좋고 그 아이디어를 솜씨좋게 녹여내서 개연성을 부여한다. 궁금증을 만들어 냈다가 풀어주는 과정도 자연스럽고 문장도 예쁘다. 그리움이라는 주제가 단순하긴 하지만 짧은 단편은 치밀한 설정과 구성보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니 그런 면에서 뛰어난 작품집이다.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편에서 솜씨를 보였으니 중단편도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공생가설>과 <관내분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멋진 SF단편집이다. 추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국내도서
저자 : 김초엽
출판 : 허블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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