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것도 많고 읽을 것도 많다
올 한 해는 아무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가장 많이 읽었다. 펴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상식적이지 않은 속도로 소설을 발표하는 작가, 대체로 단편소설집보다는 장편소설이 더 좋은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렇다. 게이고의 소설은 몰입도가 좋고, 길지 않아서 금세 읽을 수 있다. 대체로 재미있는 편이라 좀 어렵거나 재미없는 책을 읽은 후에 읽으면 머리를 식힐 수 있어서 좋다. 머리가 복잡할 때 아무 생각없이 읽으면 복잡한 일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 길어야 2~3일이면 한 권 읽을 수 있으니 책을 읽었다는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효용성이 굉장히 좋다는 느낌?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아마도 올해 마지막으로 읽는 것 같은 게이고의 소설이다. (아직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이 많아 내년에도 게이고 소설을 몇 권 더 읽을 것 같다.)
가가 형사가 주인공인 5편의 소설, 단편집이라니..
게이고의 유명한 시리즈 중에 하나인 '가가형사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아.. 첫 편을 읽기 시작하면서 살짝 탄식을 내뱉었다. 게이고가 쓴 소설 중 단편집도 몇 권 읽었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재미없었고 설정도 무리가 많았다. 책에 대한 정보를 좀 알고 샀다면 이 책을 고르지는 않았을텐데.. 책이든 영화든 줄거리가 있는건 미리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게 보통이라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이전에 《악의》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악의》는 내가 읽은 게이고가 쓴 소설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하는 작품 중에 하나로 마치 형사 콜롬보같은 모습에 인상이 깊었다. 큰 키와 덩치, 냉정한 표정, 그리고 피의자에게 반복되는 끈질긴 질문, 사건 해결. 피의자일 때 만나면 뿌리치기 힘든 귀찮은 스타일을 가진 형사다. 물론 모든 형사가 끈질긴 추적을 하고 있겠지만..
《거짓말, 딱 한 개만 더》에서도 가가 형사가 가진 캐릭터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가 형사에게 조사를 받는다. 조금씩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좁혀 들어오는 가가 형사. 애써서 막으려 하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 다섯 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식으로 사건이 풀린다.
가가 형사는 이러하다..
게이고는 가가 형사의 속내를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시점으로 쓴 소설이지만 작가는 오로지 범인(또는 그에 상당하는 조사받는 사람)이 불안해하는 심리만을 표현한다. 범인의 갈등, 불안감은 자세히 표현하면서 가가 형사는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 불쑥 튀어나오는 행동, 그리고 엉뚱해 보이는 질문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범인과 가가 형사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래서 범인은 더 불안해 보이고 가가 형사는 더욱 더 냉정해 보인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은 심리트릭(이라고 하는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을 사용해서 독자를 더 헷갈리게 만든다. 게이고는 계속해서 범인의 속마음을 보여 주면서도 마치 범인이 아닌 것처럼 표현을 한다. 범인의 속마음을 볼 수 있는 독자는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속이지는 않을테니까. 하지만 가가 형사가 추리하는 과정을 보면서 '어? 이 사람이 범인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큰 반전없이 그 사람이 범인이다. 첫 편을 읽고 나면 다음편부터는 이 수법이 눈에 보이지만 게이고는 세 번째 단편부터는 변화구를 날려서 독자에게 반전이 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본격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범행을 밝히는 과정이 중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이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진행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범인이 누군인지 비교적 빨리 알 수 있고 가장 중요한 단서는 각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상황을 주욱 보여주고 범인이 누구인지 맞춰보라는 것이 아니고 '범인은 이 사람인데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보여줄께.'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게이고의 소설들이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것이 많은데 가가형사시리즈는 그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의외로 좋은 단편소설집
처음에 밝혔듯이 게이고가 쓴 소설은 대체로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 단편집은 잘 선택하지 않는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그런 면에서 예상을 많이 벗어나는 책이다. 다른 단편집에 비해서 훨씬 낫다. 다섯 편이 모두 깔끔하게 끝이 나고 앞의 두 단편 이후 사건 전개가 익숙해 졌을 때 슬쩍 던져주는 3~5편의 반전도 좋다. 역시 쉽게 읽을 수 있고 몰입감이 뛰어난 것이야 정평이 나 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지금까지 읽어 본 게이고의 단편집 중에서 제일 낫고 좀 떨어지는 장편보다도 낫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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