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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이순신 장군 / 자살설과 은둔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 이순신 장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인물이라고 하면 가장 면저 떠오르는 분은 두 사람이다. 한 분은 조선의 4대왕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세종대왕이다. 도대체가 혼자서 어떻게 그 많은 업적을 이루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의 인물인데다가 세계적으로도 하나의 민족이 사용하는 글자 중에 만든 사람과 만든 경위까지 드러나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그리고 또 한 분, 임진왜란이라는 전국적인 국란을 압도적인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해군을 승리로 이끌어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 결국은 퇴각하게 만든 이순신 장군이다. 성웅으로 일컬어 지면서 역사적으로 인기있는 위인으로 1,2위를 다투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것은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이었다. 마지막까지 일본군을 추격하던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유탄'을 맞고서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에 그 영웅적 풍모가 더 드러나는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 하지만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살아 있을 때 그린 영정은 하나도 없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징비록에 써있는 유성룡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린 영정이다.

 

명성에 비해서 너무나 허망한 죽음

이순신 장군은 누가 봐도 굉장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전사하는 장면을 보면 오히려 좀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시에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적군의 총알이 날아 와서 맞을 정도의 허술한 곳에서 군사를 지휘를 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당시 일본의 조총의 탄환이었던 납탄으로는 고급장교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벗고 군을 지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1월 19일이면 한참 추울 때이고 징비록에 보면 이순신 장군은 출격했을 때는 밤낮으로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것은 아니다. 고려후기~조선초기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의 주요 전함이었던 판옥선 위에 나무판으로 덮개를 덮고 적이 배 위로 오르지 못하도록 송곳과 칼을 꽂았다. 갈고리로 적선을 끌어당겨 배 위로 뛰어들어 칼로 싸움을 하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로 보인다

 

이순신은 자살했다?

그래서 나오는 가설이 이순신의 자살설이다. 이순신의 자살설은 이미 임진왜란 직후에도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1. 당시에는 큰 공을 세운 자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김덕령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그 이후 같은 의병장이었던 조식의 사위 곽재우는 야인이 되는 길을 택해 화를 면했고, 이순신 장군은 전장에서 일부러 총탄에 맞아 전사하여 멸문지화를 면했다는 것이다.
2. 선조는 조선의 왕중에서 가장 왕답지 않은 왕이었고 질투심이 강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민중들의 신망이 깊었던 이순신 장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 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이순신은 실제로 전군의 절반이 넘는 군사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선조가 막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의 이런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이순신은 전란 후에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3.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참모였던 유형이 쓴 이순신 행장에는 '이전부터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는 그 공에 맞는 대우를 받으려고 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적이 물러날 때에 죽어야만 유감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홍의장군 곽재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며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장수였다. 여러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야인으로 사망하였다. 영남학파의 거두인 남명 조식의 외손자사위이다.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순신이 당시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15년 동안 생존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이유는 위의 세 가지 이유에 덧붙여서..
1. 이순신이 죽을 당시에 그 주변에는 이순신의 맏아들 이희와 조카 이완 둘만이 있었는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을 때 그걸 들은 사람이 그 둘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아들과 조카라도 전투중에 장군 주위에 고급장교 한 명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2. 이순신이 죽은 날이 11월 19일이고 충남 아산으로 시신을 옮겨 온 것은 12월인데 장례를 치른 날은 2월 11일이다. 죽음에서 장례까지 너무나도 시간이 오래 흘렀다. 게다가 15년이 지난 후에 산소를 6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장을 한 사실도 있다.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목릉. 선조와 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선조는 조선 시대 최초의 방계 왕(후궁 소생)으로서 정통성이 없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붕당정치를 조장했다고도 한다. 아들인 광해군을 질투하기도 하고 민중의 신망이 컸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도 컸다고 한다. 조선시대 최악의 왕이라고 꼽히는 왕 중에 한 명.

 

그래서 이 주장의 결론은..

1.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위장하기 위하여 평소에 곁에 두었던 장수들을 멀리하고 아들과 조카만 곁에 두고 해전을 지휘하다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죽은 척 하였다.
2. 그 후 80일간 숨어서 살 곳을 찾기 위해서 장례를 미루다가 정착을 한 후에 가짜 장례를 치룬다.
3. 15년 후에 실제로 이순신이 죽었을 때 이장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실제로 장례를 치른 것이다.

 

어차피 정식 역사에서는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1598년 11월 19일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자살설과 생존설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당시의 군주였던 선조가 조선 역사상 가장 용렬한 왕 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의 방어는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던져 놓고 본인은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도망치려고 했었다. 충성을 바치기 어려운 왕을 군주로 모신 영웅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씁쓸하다.


*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이든 생존설이든 믿지는 않는 편이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백성들 사이에 떠돌았던 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선조의 인품으로 봤을 때 이순신 장군이 살아 계셨다면 절대로 끝이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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