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연히 닥친 자연 재해, 우연히 죽은 사람
우하라 마도카는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훗카이도에 있는 외갓집에 왔다. 원래는 아빠인 젠타로도 함께 오려고 했지만 갑자기 잡힌 급한 수술 때문에 아빠는 같이 올 수 없었다. 할머니,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데 할아버지가 약주 한 잔 걸치고 운전을 하고 집에 온다고 고집을 부린다. 엄마는 발끈해서 음주운전은 안된다고 하며 엄마가 가서 운전하고 올테니 할아버지에게 기다리라고 한다. 마도카는 뒷자리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가가던 중.. 운이 없었다. 엄마는 갑자기 불어닥친 토네이도에 휩쓸리고 시신으로 발견된다. 마도카만이 겨우 살아 남았다.
몇 년 후..
다케다 도오루는 경찰출신 프리랜서 경호원이다. 새로운 경호의뢰를 받아 가이메이 대학에 가서 기리야마를 만난다. 그리고 굉장히 건방져 보이는 10대 중후반 여자아이에게 면접을 본다. 이 여자아이가 경호해야 할 대상인 마도카이다. 절대로 어떠한 질문도 하지 말 것을 다짐받은 후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채용 결정. 그런데 이 아이, 뭔가 좀 이상하다. 우연히 벌어지는 일들을 '미리' 예측한다. 예측 뿐만 아니라 분명히 상관없어 보이는 행동을 하는데 그것이 '의도된' 것처럼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연이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찜찜하다.
마에야마 요코는 아카쿠마 온천에서 마에야마 여관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얼마전에 미즈키 요시로라는 유명한 영화 프로듀서와 그의 아내 치사토가 여관에 묵었다. 그런데 부부가 산책하던 중에 미즈키 요시로가 땅에서 솟아 오른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황화수소는 공기 중에 노출되자마자 공기중에 퍼지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농도가 짙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0%는 아니다. 남자가 운이 나빴다. 물론 거의 40살의 나이차가 나고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것이 분명한 치사토가 의심을 사기는 했다. 미즈키의 어머니는 아내가 재산을 노리고 남편을 죽였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미즈키 요시로는 사고로 죽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곧 의심에서 벗어난다. 나카오카 유지라는 형사가 아무리 열심히 조사해 보고 다녀봐야 나올 것도 없다. 아오에 슈스케라는 지구과학 교수도 자주 와서 사고가 아니라 의도된 사건일 가능성을 찾아 보지만 별다른게 없다. 단지 걱정되는 건 사고가 나서 위험해 보이는 온천에 손님이 줄었다는 것이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다시 발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데..
조금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라플라스의 마녀》는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 있었다. 게이고 데뷔 30주년 기념작이라는 떠들썩한 홍보도 주효했고, 유명한 '갈릴레오 시리즈'나 '가가 형사 시리즈'가 아닌 새로운 작품이라는 점도 어필 포인트였던 것 같다. 나에게는 게이고의 소설 중에 꼭 읽어봐야 할 몇 권 중에 한 권이었다. 아껴뒀다기보다는 게이고의 작품이 하도 많다 보니 사놓고서도 그냥 뒤로 미뤄 놓았던 책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지만(사실 너무 많아서 모두 읽을 수도 없다. 이 책과 몇 권만 더 읽고 이제 그만 읽을 생각이다) 대체로 추리소설을 주로 쓴 작가라고 생각한다. 《라플라스의 마녀》 역시 추리소설의 탈을 쓰고 있다. 형사가 나오고 그 형사를 돕는 지구과학 교수가 나온다. 하지만 이전에 읽은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판타지라고 볼 수는 없고 추리소설을 쓰면서 SF적인 요소를 차용했다고 할 수 있다. SF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알고보면 능력자 배틀물
있을 수 없는 사고는 또 일어난다. 나스노 고로라는 무명배우가 또다른 온천여행지에서 역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한다. 이것 역시 첫번째 사망사건과 다를 바가 없다. 확률이 0%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다. 확률이 8백만 분의 1인 로또에 한 번 당첨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매주 누군가에게는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연속으로 로또에 당첨된다면 이건 행운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는 사고가 한 번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우연한 사고가 두 번 발생한다면 이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 된다. 나카오카 유지 형사와 아오에 슈스케 교수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두 사건 장소에 모두 나타난 마도카에게 주목한다.
아마카스 겐토는 영화감독인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아들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마도카의 아버지인 젠타로가 시행한 뇌수술로 소생한다. 마도카의 어머니가 죽은 날, 젠타로가 수술하고 있었던 환자이다. 그런데 회복을 하는 동안 사물의 위치와 운동성을 파악하고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게다가 약간의 간섭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우연처럼 보이는 현상'을 조작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연에서 벌어지는 온갖 현상들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해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초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뇌를 수술한 탓에 우연히 갖게 된 능력이다.
마도카는 겐토와는 좀 다르다. 토네이도에 의해서 어머니를 잃은 후 자연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니가 수술한 겐토가 가진 능력이 바로 자신이 갖고 싶었던 능력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자신도 겐토와 같은 수술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젠타로는 겐토의 능력이 정말 수술로 인해서 얻어진 것인지 다시 확인하고 싶었고, 때마침 딸이 조건에 딱 맞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원하기도 했기 때문에 윤리적인 압박감은 뒤로 한 채 딸에게 뇌수슬을 감행한다. 그리고 마도카 역시 겐토와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된다. 겐토와 마도카는 중요한 연구자료로서 정부로부터 보호관찰을 받게 되지만 겐토는 복수를 위해, 마도카는 겐토를 막기 위해 대학 연구소를 탈출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한다.
라플라스의 악마
과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라플라스의 악마'를 들어 봤을 것이다. 고전물리학이 뉴턴에 의해서 완성된 이후 우주에서 관측할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이 설명가능하다고 과학자들이 생각을 했는데, 그 극단에 있었던 과학자가 프랑스의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이다. 라플라스는'어떤 지적인 존재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고 이 모든 정보를 충분히 분석할 능력이 있으면 미래까지도 정확히 예측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 나온 결론이다. 그리고《라플라스의 마녀》는 이 악마가 된 두 소년소녀가 주인공이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알고 있다면 처음 마도카가 등장했을 때, 마도카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태클을 걸어 보자면 라플라스의 악마는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주창한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 입자(미시입자를 말한다)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상태를 동시에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라플라스의 주장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애시당초 입자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거시적인 세계에서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이론이 미시 세계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라플라스의 마녀'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플라스의 마녀》의 소설적 상상력을 폄훼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참 대단한 작가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동안 써왔던 소설과는 궤를 달리 하는 작품이다. 사실상 겐토와 마도카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느낌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에 SF적인 요소를 슬쩍 첨가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충분히 즐길만 하다. 좋아하는 SF소설 중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SF소설에 추리소설 요소를 집어 넣어서 흥미를 돋우는데 《라플라스의 마녀》는 비슷하지만 반대로 추리소설에 SF요소를 집어 넣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열 편 이상 읽었지만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더 많다. 몰입도가 뛰어나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고, 금세 읽을 수 있어서 하루 이틀이면 모두 읽는다. 하지만 하도 많아서 도저히 그의 책을 모두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게이고의 소설만 읽을 수는 없으니 내가 읽는 책의 숫자보다 그가 써내는 책이 늘어나는 숫자가 더 크다. 대충 몇 권 더 읽고 나서 이제 그만 읽으려고 생각 중이다. 한때는 뒤에 고스트 라이터가 붙어서 책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기도 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 팬인 일본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한 소리 듣고 그 의심은 거두기로 했다.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아이디어들을 끊임없이 책으로 써내는 건 더 대단해 보인다.
★★★★☆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SF가 붙어 있어서 사실상 추리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실체적 진실을 파헤친 후 그 근거를 설명해 줘야 하는데, 실체적 진실 자체가 상식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결론은 마도카의 입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추리소설의 가장 큰 특징을 포기한 소설이다. 하지만 새로운 소재를 추리소설의 틀 안에 집어 넣어 설득력있게 써내려갔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엄청난 몰입감도 여전하다. 대표작 중에 하나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읽으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가 많이 떠올랐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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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결정론적 세계관의 완성 라플라스의 악마 Laplace's De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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